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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Jan 15. 2021

엄마의 취향

 3년, 나의 수험생활은 남들보다 세 곱절 정도 길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도 모자라 삼수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아픔이기도 하고, 되려 자랑스러운 훈장이기도 하다. 일찍이 절망을 체험한 그때의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본격적인 어른이 되기도 전에 미리 고생을 겪어 이제는 웬만한 일들에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경험이 자랑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렸던 나는 매년초가 되면 기필코 좋은 대학에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고, 이 호언장담은 점점 공중으로 멀어지다가 입시 결과가 나오는 겨울이 되면 내게 위협적으로 돌아오는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내 가슴을 후볐다. 그 부메랑에 맞아 쓰러질 때쯤이면 고맙게도 많은 이들이 위태로운 나의 곁을 지켜주며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었다.

그 중심에서 내게 가장 많은 손을 내밀고, 가장 큰 의지가 되어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엄마다.


 누가 그러던데, 입시는 엄마와 자식이 한 팀을 이루고 치르는 경쟁이라고. 나한테 입시는 엄마와 한 팀을 이룬 것도 모자라, 서로의 발을 동여 메고 앞으로 나아가는 2인 3각 경기와도 같았다. 엄마는 내가 넘어질 때쯤이면 내 발을 자신의 얇은 발목에 더 세게 동여 메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자주 넘어지는 사람이라 그때마다 내가 쓰러지지 않게 더 질끈 동여 멘 끈에, 엄마의 얇은 발목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3수생의 하루는 이랬다. 새벽 5시 반이 되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악이 울린다. 비몽사몽 간에 머릿속에서 내가 애당초 이 음악을 싫어했는지 아니면 알람음으로 쓰여 이 음악을 싫어하게 된 건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곧바로 근처 헬스장에 가서 약간의 유산소 운동을 한 후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고 이내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나보다도 일찍 일어나 준비한 '수험생을 위한 고영양 6첩 반상' 앞에 앉아 몇 술 뜬다.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수험생 특유의 불안과 걱정에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을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는 '억지로라도 더 먹어' 하며 핀잔을 준다. 엄마의 조금은 강압적인 독려에 힘입어 억지로 밥공기를 싹싹 비워낸다.


 그리고 시계가 7시를 가리킴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학원으로 향한다. 손에는 엄마가 새벽같이 일어나 싸놓은 샐러드 도시락을 든 채로 말이다. 도시락의 메뉴가 왜 하필 샐러냐고? 그 이유는 내가 학원에서는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까다로운 수험생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하루 종일 이어지는 학원의 정규수업을 듣고, 저녁 간식으로 엄마가 싸준 샐러드 도시락을 꺼내 먹는다.

그리고는 10시까지 자습을 한다. 수학을 영어를 국어를 사회탐구를 풀다가.... 이내 가방에서 소설을 꺼낸다.

현실에서 조금 떨어진 소설 속 세계로 슬금슬금 도망친다.


 엄마는 그동안 가게에 나가 쉼 없이 일을 한다. 피곤에 찌든 채로 손님을 맞고 돈을 번다. 10시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가 시간에 맞게 차려놓은 '수험생을 위한 고영양 6첩 반상'을 먹고 헬스장으로 간다. 가서 12시까지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내일 아침거리를 준비해 놓은 엄마의 지친 얼굴이 보인다.


 이 일과는 본격적으로 수능 준비에 들어가는 1월부터 11월까지, 그러니까 장장 11개월 동안 이어진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인천으로 잠시 이사해 있던 때인데, 학원이 원래 살던 서울 본가 근처라서 나는 주중을 엄마 가게 부근의 단칸방에서 지냈다. 엄마는 아들을 잘못 낳은 죄로 매일같이 5시에 일어났고, 행여 아버지를 따라 인천 집에 가야 할 때면 4시에 일어나 아버지가 운전하시는 차의 조수석에서 쪽잠을 자면서 내게 밥을 해주러 왔다. 이렇게 쳇바퀴처럼 이어진 고된 하루하루는 쌓여갔고, 나는 켜켜이 쌓인 이 시간들을 딛고 마침내 대학에 갔다.

 

 오래 갈망하던 대학생활이었기에 공부도, 놀기도, 연애도, 아르바이트도 부지런히 해냈다. 1학년 1학기 여름방학 때 무려 5번의 여행을 다닐 정도로 여기저기 쏘다녔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오래 밀린 빚을 받기 위해 애쓰며 허청허청 다니는 빚쟁이처럼. 이렇게 천방지방 쏘다니는 와중에 내겐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내가 지나온 경험들과, 나를 지나간 사람들에 의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명확해졌다.


 속삭이듯 읊조리며 마음을 움직이는 유재하의 노래, 맛이 씁쓸하지만 그 덕에 내 젊은 삶의 씁쓸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기네스 흑맥주,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화~'한 후라보노 껌과 단숨에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상큼한 리콜라 레몬 사탕, 적절한 무게감과 이와는 반대로 기분 좋은 시큼함을 동시에 전해주는 케냐 AA원두, 머리를 띵! 하고 맞은 기분이 들게 하는 마그리트의 신기한 그림들, 윤동주 하루키 황현산 피천득 김애란..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글, 해석하며 보는 재미를 선사하는 멋진 영화들 등등. 여기저기 다니고 이것저것 겪으며 향유했고 즐기며 내 삶을 윤택하게 하는 그것들을 찾아냈다.


 리콜라 레몬 사탕을 입안에서 천천히 녹여 먹으며 점잖은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후, 친구 녀석과 기네스 흑맥주를 나누어 마시고 적당히 취해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우연히 잠에 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문득 엄마의 취향에 대해 생각했다. 젊었던 엄마의 얼굴에 나로 인한 주름들이 늘어가는 동안 엄마는 어떤 취향을 갖게 되었을까.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적어도 내가 커오는 동안 엄마는 좀처럼 좋아하는 것도, 필요로 하는 것도 말한 적이 없었다. 물론 내겐 엄마가 자신의 취향을 위해 돈을 쓰는 걸 본 기억도 없었다. 꾸준히 돈을 벌었고 나와 누나,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꾸준히 돈을 써왔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 혈혈단신 시골에서 올라와 특유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으로 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자식들에게 부족함 없는 미래를 선물하는 동안 스스로 오늘의 취향을 내일로 미룬 사람. 그 사람이 나의 엄마였다.

그걸 생각하고 난 뒤 나를 기쁘게 하던 나의 취향들이 얄밉고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엄마에게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나와 식구들을 위해 희생한 하루하루를 보상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도 멋진 취향을 선사하고 싶어 졌다.


 그 이후로 내게는 어디를 가든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있는지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길을 걸으며, 서점에서, 여행지에서, 빵집에서, 카페에서 엄마의 취향에 들어맞을 것들이 있는지를 살피게 되었다.

자전거를 몰고 나선 산책길에서 엄마가 좋아할 만한 카모마일 차를 사본다. 아버지를 보러 간 종로 3가에서 엄마를 웃게 할 꽃다발을 산다.(물론 엄마는 꽃다발보다는 키울 수 있는 화분을 더 좋아할 텐데 하며 후회하기도 한다.)

요즘 내 또래가 좋아하는 설빙 빙수나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서 엄마의 가게로 달려가기도 한다. 또 내가 좋아하는 케냐AA 원두를 사서 진한 커피를 내려 엄마에게 건네기도 한다.


 엄마가 내게 건네준 사랑과 희생을 다 갚을 순 없겠지만, 엄마에게 남은 시간들을 행복으로 채워주고 싶다. 그게 나를 위해 자신의 오늘은 희생한 엄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테니까. 그 때문에 나의 '엄마 취향 찾기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 같다.

다음 휴일에는 엄마와 함께 신촌 미분당에 가야지.

엄마는 쌀국수를 처음 먹어볼 테니까, 고수는 빼고 달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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