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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May 17. 2021

우리에겐 가면을 벗을 곳이 필요하다

  텅 빈 방의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둘걸..'

이미 늦은 후회를 되뇌며 책상 위에 거꾸로 얹어놓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발신번호를 확인한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녀석이다. 오늘처럼 마음이 축 쳐지는 날이면 귀신같이 전화를 해대는 녀석.

올해로 내가 스물다섯이 되었으니까 햇수로는 벌써 23년을 함께 해온 친구, 진우였다.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했어, 넌 도대체 왜 먼저 전화를 안 하냐?" 녀석이 수화기 너머로 다짜고짜 역정을 낸다.

"왜 무슨 일 있냐? 또 혼자 카페여서, 심심해서 전화했나 보네?" 나는 반가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러 비꼬며 녀석에게 심심한 안부를 묻는다.

"혼자 카페긴 한데 심심하진 않아, 그냥 너 고민 있는 것 같아서 전화했어"

'혹시라도 내 방에 CCTV가 달린 게 아닐까?'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상상을 해본다. 그 정도로 녀석은 촉이 좋다. 곁에 있을 때는 물론, 멀리 있을 때도 내 기분을 정확하게 짐작한다.

"결론은 한 가지네, 이 경우에는 술을 마셔야 해. 너 시간 언제 비냐"

내 기분에 대한 그의 예리한 예측과 진단은 언제나 술이라는 하나의 처방으로 귀결된다. 물론 나 또한 바라던 바이다.


 "너 같은 성격을 누가 받아주냐, 나니까 23년 동안 친구 한 거야. 고맙게 생각해"

"너도 썩 둥글둥글한 성격은 아니야. 나니까 너랑 친구 하지"

살가운 악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른다. 오늘은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날이니까 잔 가득 술을 채운다. '취하면 신촌 길바닥에서 실컷 뒹굴다 가지 뭐, 쪽팔려도 혼자는 아닐 테니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빠르게 잔을 비운다.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녀석의 술잔은 새로 채워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바닥을 보인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왔을 때, 녀석은 은근하게 물어본다.

"무슨 일인데 그래"

술이 들어가니 용기가 생긴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녀석에게 털어놓는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나는 반대로 녀석에게 묻는다.

"너는 그때 그 일 어떻게 됐어"

이제는 녀석이 한참을 혼자 떠든다.

서로의 말을 들으며 간간이 위로의 눈짓과 공감의 고갯짓을 건넨다. 이렇게 주고받는 독백 속에서 우리의 상처는 얼마간 치유가 된다.


 녀석과 나는 한 동네에서 자랐다. 같은 길을 아장아장 걸었고, 같은 간판을 띄엄띄엄 읽으며 한글을 익혔다.

같은 초등학교를 나와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비 오는 등굣길도, 눈 오는 하굣길도 함께 걸었다. 어쩌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에 갈 때면 나는 늘 녀석의 옆자리에 앉아 녀석의 도시락 속 단골 메뉴인 오징어 동그랑땡을 먹었다. 마찬가지로 녀석도 우리 엄마의, 햄이 잔뜩 든 김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코 밑에 거뭇거뭇 수염자국이 생기던 고등학생 시절과

각자의 이유로 여러모로 휘청이던 스무 살 언저리, 그리고 그 뒤로도 녀석과 나는 언제나 서로의 곁을 지켰다.


 어릴 적 몇 번 다툰 적은 있었으나, 그 이유는 대체로 나의 모난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화가 많던 내가, 잘 놀다가도 먼저 화를 내고 느닷없이 사과를 건네면, 녀석은 망부석처럼 오도카니 서서 별 미동도 없이 그 사과를 받곤 했다. 감정과 이성, 급박함과 느긋함, 모남과 둥글둥글함, 거침과 부드러움, 나와 녀석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은 대체로 이렇다. 상반되는 이 단어들처럼 우리 둘은 너무나도 달랐기에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었다.

같이 자라면서, 녀석은 나의 모난 구석을 둥글둥글 깎아 주었고 나는 녀석의 순하디 순한 성격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짝을 이룬 악어와 악어새처럼, 이러한 공생관계 덕에 우리는 조금씩 자라났다.  


 서로의 성격을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서로의 성격을 고쳐가며 지내온 세월이 벌써 23년이 되었다.

서로의 울음과 웃음, 슬픔과 기쁨을 지켜보며 같이 울고 같이 웃었다. 때문에 녀석은 나의 가식 없는 웃음과 울먹이기 직전의 일그러진 표정을 안다. 나 또한 녀석의 진실된 웃음과, 씁쓸한 미소 뒤에 숨어있는 서러운 얼굴을 안다. 각자의 진심 위에 어떤 가면을 씌워도 그 가면 뒤에 짓고 있는 표정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무언가를 숨기려 해도 도무지 숨길 수가 없고, 그 때문에 무언가를 숨길 생각도, 아니 숨길 것조차도 없어진 관계이다.

나는 녀석 앞에서 내 민낯을 드러낸다. 가면을 걸치지 않아도, 내가 가진 마음속 굴곡과 모순을 모두 보여준대도 괜찮을 것을 안다. 녀석도 마찬가지다. 녀석이 가진 욕심과 부족함을 나에게 솔직하게 드러낸다. 가면 뒤 진심을 드러내는 것의 대가가 우리에게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진심을 드러내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요즘이다.

가면 너머의 진심을 보여주는 이들이 되려 고약한 일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진심이 휴지 한 조각 보다도 더 쉽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모습이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서 나의 진실된 표정과 감정을 감추고 그 위를 인위적인 가면으로 덮는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가면을 바꾸어 쓰며 살아간다.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누군가의 누구로서, 어딘가의 누구로서 각자에게 부여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의 모습을 꾸며낸다. 좋은 선배, 좋은 후배, 좋은 직업인,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늘 더 '좋은' 가면을 쓰려한다.


 따라서 때와 장소에 맞게 가면을 곧잘 바꾸어 쓰는 것은 엄청난 능력일 수도 있겠다. 진심보다는 사회성이 더 귀한 값으로 환산되는 게 바로 '사회'생활일 테니까.

그러나 그 가면이 우리를 이따금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내 모습일까'하는 고민 앞에서 끝없이 혼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잠시 가면을 벗은 채로 마주할 '진실된' 관계들이 필요하다. 가면 뒤에서 숨죽이던 우리의 민낯을 쉬게 하고, 다시 또 가면을 걸칠 준비를 할 이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조금 덜 외로워진다.


'이것이 진짜 내 모습이지'라고 느낄 수 있도록 귀중한 시간을 건네주는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덜 외로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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