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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Apr 25. 2021

민들레의 삶


꽃 피는 춘삼월에 태어난 탓인지 유난히도 꽃을 좋아한다.

타고난 제 빛깔을 자랑하듯 형형색색으로 만개한 꽃을 볼 때면, 그 꽃의 아름다운 빛이 내 마음속으로 들이쳐 곱게 스미는 기분을 느낀다. 덕분에 그때만은 일상의 고민을 잊고 아무 걱정도 없이 한껏 들뜬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힘으로 어딘가를 찾아갈 나이가 되자, 꽃을 보자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내 나름의 낭만이 시작되었다. 꽃 피는 봄이면 대로를 따라 줄을 이룬 벚꽃 나무의 연분홍색 도열을 보러 신촌이나 여의도로, 그마저 여유가 허락되지 않을 때면 가지각색의 꽃을 잘 가꾸어 놓은 집 근처 '서울로' 산책로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꽃이 피지 않는 계절에는 철이 지난 꽃을 인공적으로나마 피우고 있는 창경궁이나 서울식물원의 온실로, 혹은 꽃을 잔뜩 사다 꾸며놓은 카페나 찻집으로 구경을 간다.

익숙하게 혼자라도, 어쩌다가 둘이서, 아주 가끔은 가족들과 함께 꽃이 주는 낭만을 만끽한다.


 꽃의 낭만을 즐기던 초기에는 어디에서 자라 어떻게 피어난 꽃이든 모두 다 분별없이 좋았다.

꽃은 핀다는 사실 자체로 대견하고, 원래가 아름다운 것이니까 내 취향에 들어맞고 아니고 차이는 있을지언정, 특히나 더 예쁜 꽃도, 특히 덜 예쁜 꽃도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야트막한 철학도 있었다.

그런데 꽃의 이름과 성장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정도의 짧은 배움을 얻게 되자, 자꾸만 '이 꽃보다는 저 꽃이 더 좋다'는 식의 확신에 찬 주관이 생겨난다. 특히나 이번 봄에 유독 나의 눈길이 향하는 꽃은 바로 봄이면 지척에서 피어나는 민들레이다.


 사실 민들레는 장미나 튤립처럼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은 아니다. 땅바닥에 딱 달라붙어 겨우겨우 노랗게 물든 작은 머리를 산발로 피워내고, 커봐야 오가는 사람들의 발목 높이에 그치는 볼품없는 앉은뱅이 꽃이다. 또 흔하기는 얼마나 흔한지, 길가의 흙무더기에서는 물론 아스팔트 돌 틈 사이에서도, 더러운 물이 수시로 스미는 하수구 아래 진흙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풀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길섶의 민들레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요즘 내가 가지는 생각들과 민들레의 생이 맞닿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가 그러던데, 취향은 생각을 닮는다고.


 민들레는 무성생식을 하는 꽃이라고 한다. 무성생식이라는 말이 낯설어 그 뜻을 찾아보니, 따로 암수의 구분이 없는 식물이 홑몸으로 씨앗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 무성생식을 하는 식물의 씨앗에서 비롯되어 피어난 새로운 풀꽃은 모계와 유전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민들레는 자기와 똑같은 또 다른 자기를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는 것이다. 바람에 흩날리던 홀씨는 시골의 도타운 흙더미에, 혹은 이 도시의 척박한 아스팔트에 안착하여 이듬해 봄에 또다시 노란 꽃을 피워내고 다시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나간다. 하나의 풀꽃은 더 큰 군락을 이루기 위해 우직하게 이 과정을 반복한다. 꾸준하게 적응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다.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하면서 재능과 꾸준함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만들어내려는 무언가가, 혹은 내가 해내고자 하는 무언가가 내게는 없는 탁월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따금 크고 많은 내 욕심과 스스로의 '재능 없음' 사이의 괴리가 눈에 보여,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고통의 귀결은 늘 정해진 결론으로 향한다. 내게는 없을지도 모르는 타고난 재능이 무색할 만큼의 꾸준함을 갖추자는 다짐 말이다.


 내 재능에 뚜렷한 한계가 있어서 단 한 번의 시도로는 뛰어난 결과를 낳을 수 없다면, 두 번 세 번, 아니 될 때까지 우직하게 시도해서 결국에는 재능 있는 누군가의 결과와 비슷하게라도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 세상이 공평하다면, 천재에게 재능이라는 특권이 주어졌을 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꾸준함이라는 특권이 주어졌어야 마땅하다고 믿으며, 오늘도 나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마음과 몸을 가다듬는다.


 결국 타고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장미나 튤립 같은 사람은 못되더라도, 꾸준할 수 있다면 끈질기고 우직할 수 있다면 민들레 같은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그 우직한 과정의 말미에는 꽃 비슷한 무언가를 피워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장미나 튤립보다 민들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결국 수천수만 년을 자기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버텨내는 민들레의 삶이, 잠깐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장미나 튤립의 삶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만큼 우리 삶은 충분히 길고 아득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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