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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May 23. 2021

원주민의 후예

 '북아현동 아줌마들' 눈에 나는 여전히 코흘리개 꼬마다.

여기서 '북아현동 아줌마들'이 누구냐고?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2동에 살던 여자 어른들을 말한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불러서 내게는 여전히 너무나도 친숙한 이름, 입에 담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름, 그 이름이 바로 '북아현동 아줌마들'이다. 어떻게 이름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냐고? 그도 그럴 것이 그분들은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있던 시절부터 15살이 되던 시기까지 거의 매일같이 나를  돌봐주시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동네 사랑방인 미용실 집 아들이던 나는, 시장에 오고 가며 매일 두세 번씩 엄마 가게에 들르시는 '북아현동 아줌마들' 품에 안겨 자랐다. 아줌마들은 동네 누나, 형들과 한참 터울이 나는 나를 유난히도 예뻐하셨다. 시장에 갈 때면 엄마의 미용실에서 홀로 아장아장 걷고 있던 내 손을 꼭 잡고 가셨다.

"뉘 집 아들이 이렇게 귀엽나, 눈이 아주 똥그랗네" 알면서도 매번 묻는 과일가게 아저씨의 짓궂은 물음에

"내 아들이지, 날 닮아 이렇게 잘났어" 아줌마들은 매번 능청스레 답하셨고 그 덕에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엄마가 바뀌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엄마를 가졌을지도 모를 아이가 되었다.


 아줌마들의 왕언니 지물포 아줌마는 맛깔난 전라도식 겉절이를 들고, 부업으로 분식을 만들어 파시는 옆집 비디오 가게 아줌마는 떡볶이가 맛있게 되었다며 한 국자 포장해서, 옷 공장을 하시는 주연이 누나네 아줌마는 손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낸 고구마순 김치를 담가서, 초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요크셔테리어를 키우시는 영진이 누나네 아줌마는 내가 좋아할 만한 팥빙수,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 등등의 간식거리를,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각기 바리바리 싸 들고 엄마 가게로 오셨다. 이유는 단 하나, 입이 짧은 나를 먹이기 위해서!

북아현동 꼬마를 향한 아줌마들의 정성 덕분에 우리 집 식탁에는 날마다 새로운 음식이 올라왔다.(물론 그 정성의 최대 수혜자는 늘 우리 아빠였다는 건 아줌마들한테 여전히 비밀이지만)


 동네 곳곳에 엄마들을 둔 나는 아주 천방지축으로 자랐다. 나이 많은 형들을 제치고 늘 골목대장 자리를 도맡았다. 나이도 어린 내가 자신들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는 것이 마뜩잖아하던 형들이 나를 몇 대 쥐어박을 때면, 나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왜냐하면 그 울음을 듣고 언제나 내 편인 아줌마들이 달려와 형들을 혼낼 테니까. 실제로 미용실 집 아들의 울음이 들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지물포 아줌마가, 비디오 가게 아줌마가, 영진이 누나네 아줌마가, 주연이 누나네 아줌마가 나타나 형들에게 소리치셨다.

"누가 동생을 괴롭히니? 성우 때린 놈 누구야!" 그때마다 형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글로 적다 보니 그 형들에게 미안해진다. 그러게 때리지는 말지.(메롱)


 바쁜 엄마는, 충만한 사랑으로 아들을 대해주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더 마음을 썼고 그럴수록 아줌마들은 우리 식구들의 더 좋은 이웃이 되어주었다. 그 때문에 엄마의 미용실은 동네 사랑방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낮이면 아줌마들끼리 기쁨과 웃음을 주고받는 찻집이 되었다. 문이 닫힌 시간, 말하자면 아저씨들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간이 되면 어른들의 설움을 씻어내는 술집이 되었다. 저녁상을 물린 아빠가 9시에 미용실 문을 닫고 커튼을 침과 동시에, 닭발이며 닭똥집 볶음이며 두 손 가득 안줏거리를 든 아줌마들이 속속 도착하셨다. 그다음으로 빨간 뚜껑의 소주병을 검은 봉투 가득 든 아저씨들이 미용실 문을 여셨다. 물론 그때 아저씨들의 손에는 늘 아이스크림이며 과자며 나를 위한 작은 선물도 들려있었다. (아저씨들이 사 오시는 아이스크림은 늘 메로나 혹은 비비빅이었고, 과자는 뻥튀기 아니면 '뻥이요'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순전히 '아저씨'들의 취향이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나의 인사를 시작으로 그날도 동네 술판이 벌어진다. 가게 앞을 지나가던 세탁소집 아저씨도, 내 친구 경민이의 아빠인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도 우리 아빠의 손에 이끌려 그야말로 박애주의적인 이 술판의 일원이 된다.

"성우 안자네? 안녕"

미용실 한쪽 단칸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나에게 건네는 아저씨들의 안부는 술판에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살짝 멋쩍은 그들에게 충분한 입장료가 되어준다. 그 작고 소박한 술판에서 우리 동네 어른들은 함께 안주를 씹고, 안줏거리가 되는 누군가를 씹으며, 오늘의 설움을 씻고 내일의 설움에 대비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술판은 어른들의 삶을 살판으로 만드는 순간이었다는 걸.


 어린 마음으로도 오래도록 계속되길 바라던, 그 살판나는 술판은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대개들 많은 것들이 안팎으로 혼란스러워진다는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북아현2동의 그 사람 냄새나던 술판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었다.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동네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 타이틀이 흔들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재개발' 때문이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우리 동네가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주장으로, 또 서울의 주거인구를 늘린다는 목적으로 우리 동네를 차츰 헐어갔다. 제일 먼저 시장이, 시장에 다니던 상인들의 집이 무너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순서를 얌전히 기다리던 지물포가, 비디오 가게가, 주연이 누나네 공장이, 엄마의 미용실이 차례차례 무너졌다. 만들어진 지 아주 오래되었기에 아주 오랜 이웃들이 있는 곳. 가난했지만 다 같이 가난해서 가난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던, 더구나 가난했지만 주고받는 마음만은 강남 그 어느 부유한 동네보다도 넉넉했던 서울의 작은 동네, 나의 고향 북아현2동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사장에 둘러친 붉은 현수막을 보았다.

'원주민 죽이는 재개발 즉각 중단하라!' 재개발 예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단어를 보니 스스로가 아메리칸 원주민 부족의 아이처럼 느껴졌다. 어느 한낮에 총칼로 무장한 백인들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긴 아메리칸 원주민 부족의 아이 말이다. 어느 한낮에 트랙터와 불도저로 무장한 채 나의 고향을,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어른들의 술판'을 빼앗아가는 재개발이 미웠다.

'정치인들은 술잔을 돌려가며 벌리는 정다운 술판도, 그럴만한 고향도 없나 보다' 혈기 왕성한 중학생 소년의 마음은 아쉬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 '원주민 죽이는 재개발 즉각 중단하라!'라고 쓰인 붉은 현수막이 내 안에서도 촤르륵 펼쳐졌다.


 어쩌면 소년의 마음속 그 붉은 현수막은 하나의 예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어딘가로 갈 돈이 없는 북아현동 언덕배기의 할머니들은 더 춥고 습내 나는 단칸방으로 내몰렸고, 이내 원래의 속도보다 더 빨리 늙어갔다. 평생을 어렵게 모아 드디어 등 붙일 집을 마련한 채소가게 아저씨는 터무니없는 보상금에 화병이 나 몸져누웠다. 설움과 분노는 독처럼 쌓였고, 생존의 위태로움은 암처럼 퍼졌다.

'원주민'들의 삶은 북아현동에서, 용산에서 그리고 서울 곳곳에서, 사람보다 우선순위에 놓인 개발에 의해, 또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동원된 용역 깡패들과 공권력에 의해 짓밟혔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아메리칸 원주민처럼, 살기 위해 죽창을 들고 높이 더 높이 올라 깃발을 흔들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혹은 '사람보다 우선된 개발은 없다'라고 외치며. 그러나 그들이 들었던 뾰족한 죽창은 정부와 정부 친화적인 여러 언론들에 의해 그것보다 더 뾰족한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도무지 더 오를 달동네가 없어진 그들이, 살기 위하여 오른 건물 옥상과 크레인은 그들의 무덤이 되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그들의 외침은 돈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참혹한 비극 속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이제는 없는 내 고향 북아현2동을 생각한다. 삶의 터전에서 철저히 내몰린 채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던, 나의 따뜻했던 '원주민 부족'들을 떠올린다. 지금도 간간히 그분들과 마주할 때면 반가운 생각이 들다가 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그것은 아마도 아쉬움과 그리움 탓이겠지.

그때의 우리 동네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 서울의 곳곳은 다시 끊임없이 낡아갈 테고, 정부는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또다시 서울의 낡은 이곳저곳을 헤집어 놓을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도시개발의 굴레에서, 나는 스스로 '마지막 남은 원주민의 후예'가 되기를 자처한다. 더는 어떠한 정당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고향을 잃고, 이웃을 잃고, 평생 헌납해온 피땀의 결실을 빼앗기는, 그때의 우리와 같은 '원주민'들이 새로이 생겨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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