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의 눈길도 오래 머물지 않는 물건이 있습니다. 주방 서랍 구석, 배달 온 자장면 그릇 위, 혹은 미용실의 분주한 트레이 구석에서 툭 하면 굴러다니는 노랑 고무줄입니다.
사람들은 이 작은 소모품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에 몇 원이나 할까 싶은 하찮은 가격, 특별할 것 없는 매끈한 질감, 다 쓰고 나면 미련 없이 버려지는 운명까지.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작은 원 안에는 우리가 잊고 사는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크고 단단한 것들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고 믿기 쉽지만, 정작 일상의 수많은 매듭을 조용히 감당하는 것은 이처럼 작고 유연한 것들입니다.
고무줄의 가장 큰 미덕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다 향을 머금은 미역 다발을 꽉 움켜쥐기도 하고, 돌잔치 답례품의 화려한 포장지를 단정하게 여미기도 합니다. 파마하는 어머니의 머리칼 위에서 뜨거운 열기를 견디기도 하고, 아이의 망가진 장난감을 임시로 고정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시장 할머니의 나물 단에도, 두툼한 서류 묶음에도, 아이의 머리 위에서 두 갈래로 묶인 단발머리에도 고무줄은 어디서나 제 몸을 맞춥니다.
묶어야 할 대상이 굵으면 굵은 대로 제 몸을 한껏 늘리고, 가늘면 가는 대로 몇 번이고 꼬아 길이를 맞춥니다. 상대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자신을 바꾸는 그 유연함은, 굴욕이 아니라 세상을 품어내는 방식입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은 부러지기 쉽지만, 부드러운 것은 어떤 풍파 속에서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관계와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조금 늘어날 수 있을 때, 상대도 끊어지지 않고 연결될 수 있습니다.
고무줄은 자신의 존재를 뽐내지 않습니다. 화려한 리본처럼 선물의 주인공이 되려 하지도 않고, 강력 접착제처럼 흔적을 남기며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제 역할을 다하는 동안 묵묵히 몸을 늘려 버틸 뿐입니다. 그러다 필요가 다하면 다시 작은 원의 모습으로 돌아가 구석에 놓입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채 뒹굴다가도, 누군가 고무줄을 절실히 찾을 때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어줍니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게 곁에 있는 것들입니다. 있을 때는 그 존재를 잘 모르다가,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도 그런 존재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날에만 연락하는 화려한 인맥은 아니지만, 내가 힘들 때 툭 연락하면 "무슨 일이야?" 하며 달려와 줄 것 같은 사람들. 별다른 말 없이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든든한 사람들. 노랑 고무줄 같은 그 존재들이 사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매듭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기억되지 않아도, 누군가 흩어질 것 같은 순간에 조용히 곁에서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오래 가는 종류의 연결일지도 모릅니다.
고무줄을 보며 배우는 또 다른 것은 복원력입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고무줄은 다시 원래의 둥근 모양으로 돌아옵니다. 한 번 늘어난 채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고무줄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늘 팽팽할 수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극한까지 잡아당겨야 하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 당김 속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는 날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긴장이 끝난 뒤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힘입니다.
유연하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맞춰주는 삶이 아닙니다. 외부의 압력에 잠시 몸을 내어주더라도, 본연의 나를 잃지 않고 다시 둥글게 돌아올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고무줄이 아무리 모양을 바꿔도 결국은 하나의 원이듯, 우리도 세상의 풍파에 유연하게 대응하되 스스로의 중심은 늘 간직해야 합니다. 그 중심이 있어야 늘어났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삶을 스스로 설계하며 살아간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이 더 많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잡아당겨지는 순간들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뻣뻣하게 버티기보다, 잠시 늘어나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것. 그리고 결국 다시 자신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것. 고무줄은 그 과정을 말없이 반복합니다.
오늘도 서랍을 열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노랑 고무줄 하나를 발견합니다. 먼지를 툭툭 털어 손가락에 걸어봅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온기가 손끝에 닿습니다. 이 작은 원이 품고 있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상대를 아프게 찌르지 않는 둥근 마음, 어떤 상황에서도 제 몫을 다하는 유연함,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연결을 돕는 헌신.
대단한 영웅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흩어진 마음을 단단히 묶어주고 벌어진 틈을 조용히 메워주는 존재. 흔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세상의 수많은 매듭을 홀로 감당해 내는 노랑 고무줄. 그 작고 노란 원을 손가락에 끼운 채, 오늘 하루를 조금 더 부드럽고 둥글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