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가 사라졌다.
물류 센터 알바는 다른 알바와 급여가 차이가 없다. 최저 시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 만차가 되기 십상이어서 사람들을 버리고 오고, 집 갈 때도 다 태우지 못하고 버리고 간다. 허구한 날 지원 차량을 한 시간씩 기다리면서 아침에 멀리 산다는 이유로 제시간에 출근 못 하는 이유에도 계속해서 찾는 이유는 일급이기 때문이고 자신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근무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총괄 담당자님은 일용직들이 퇴근을 제시간에 하고 못하고는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대놓고 말했고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면 어떡하냐고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은 일용직이 아니고 계약직만이라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 했다. 일용직이라서 계속 그 사람을 볼 것이 아니기에 그냥 참자는 생각이 바로 떠오르면서도 순간순간은 아주 기분이 나쁘다. 여하튼 설날 용돈과 합쳐서 적금에 쏟아부었다.
55만 원.... 어릴 때부터 계속 들었던 적금까지 합치면 300이 조금 넘는다. 큰돈 같지만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매직 파마를 하고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 그리고 패드 전용 키보드와 마우스를 세트로 사고 싶었다. 균일가가 55만 원이었다. 흠... 전자기기 하나 사면 사라질 적금... 그냥 가지고 있던 노트북을 그대로 가져가고 돈을 좀 더 모아서 노트북 커버를 사기로 했다. 설날을 기점으로 엄마는 나에 대한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었다. 그러자 돈이 너무 아까워졌다. 그리고 문득.... 허무해졌다. 아.... 내 돈이니까 너무 아깝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기적인 인간이란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아... 아까워...." 더 이상 돈으로 사치를 부리는 것(동생한테 플렉스 해주는 것, 옷 사는 것, 적금 넣는 것) 등이 너무 싫어졌다. 집 밖에 안 나가면 돈 쓸 일이 없겠지. 그러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돈이 없으면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인가.... 돈이 없으면 밖에 나갈 일이 적어지고 그러면 또 우울해지고 결국 우울증이 온다. 요즘 내 주변 친구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보면, 우울증은 피해 갈 수 없는 저주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 시기가 다를 뿐. 공부를 안 하고 그림을 시도했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포기하고 다시 재수 학원을 다니다가 우울해진 친구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서 우울해진 친구와 좋은 대학을 포기하고 알바만 하다가 우울해진 친구 등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근본은 돈이다. 공부에 필요한 돈, 재능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돈, 심각한 우울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돈, 미래로 인해 걱정되는 돈. 경쟁 상대가 아니게 되자, 친구들을 돕고 싶어졌다. 한 친구가 자신의 엄마를 통해서 나한테 과외를 신청하고 싶다고 자존심까지 무릅쓰고 요청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그때 당시에 그 친구가 우울한지 모르고 있었다. 그때 거절했던 게 미안했지만 나도 누군가를 대신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울증을 미리 겪어본 사람이기에 친구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알고 있었다. 나는 재수를 할 바엔 그냥 죽어버렸을 것이다. 내 멘털에 너무 해롭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 중 재수해야 하는 친구가 있으면 대신해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고3 때 재수는 나에게 가장 큰 위협이자 목에 겨누어진 칼이었다. 그래서 "재수하면 되지."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이제 보니,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1년 정도 더 투자하는 게 실용적이기는 하나, 그 1년은 고도의 효율을 위한 단기간 지옥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걱정인 건 돈 때문에 변해버릴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