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에 빠졌었던 걸까
'지혜의 바다'라는 도서관이 내게 있어 소중한 이유는 한 번씩 정신적으로 무너질 때마다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책을 읽고 ITQ실기를 복습했다. 도서관에서 하는 강연은 내가 관심 있는 것들만 가끔씩 듣는 편인데 오늘 들은 강의는 다시 내 마음에 자그만 불씨를 지펴 주었다. 영화와 도서를 연결 지어 그 안에 숨은 철학과 이념을 재미있게 풀어낸 강의는 내가 강사님을 동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문예창작학과에서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을 때 느끼던 희열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내 학과에 불만족스러웠던 게 아니었던 거라고. 그저 무언가를 더 원하는데 얻지 못할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이 싫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햄릿'과 같은 부류였다.
오늘 '인문학당 달리'의 박선정 소장님은 햄릿과 라이온킹을 연결 지어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햄릿은 변화하지 않는 인물이고, 심바는 변화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햄릿과 오필리아처럼 살기보다는 심바처럼 사는 게 좋다고 하셨다. 강의에서 라이온킹을 다시 보니 그 안에서 햄릿이 보였다. 어렸을 때 몇 십 번은 돌려본 영화였는데, 맙소사. 햄릿은 자신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안 좋은 방식으로 푼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 왕위를 가지기 위해 숙부를 죽이는 것을 해내지 못한다. 아니,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우유부단한 것도 맞고 비겁한 것도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햄릿을 읽으면서 한 번도 햄릿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햄릿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이때까지 내가 햄릿과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햄릿의 무의식 속에 있는 욕망, 욕구는 왕위였다. 그게 엑스트라와의 대화에서 드러난다고 배웠을 때, 그냥 지나쳐버린 대사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필리아에게 하는 막말들, 그리고 왕비인 어머니에게 대드는 것까지 어찌 보면 다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자신은 과거에 얽매여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멜랑콜리아형 우울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대목은 단순히 죽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로써 사느냐 내가 아닌 그저 껍데기로 사느냐에 대한 것이다. 한동안의 나의 모습과 많이 겹쳤다. 나는 스스로 의사결정 내리는 게 무서웠다. 한동안 대학과 입시에 대한 것, 내 미래에 대한 모습을 회피했으며 나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으려고 했다.
과거에 얽매여 있어 조그만 행복들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걸 느끼면서 난 내가 햄릿보다는 심바가 되길 원한다는 걸,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 인문학을 좋아하고 언어를 좋아하면서 나름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미래의 먼 목표와 꿈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흥미 있는 것, 새로운 느낌과 영감을 주는 것, 그게 나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햄릿처럼 비극을 만들고 싶지 않다.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면 다시 내가 원하는 것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정 욕구를 버리고 느리더라도 걸어 나갈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은 그런 것이고 그게 힘들더라도 나는 가고 싶다. 도서관에서 강연을 하는 강사님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소통이라는 것이 100% 서로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꼭 무언가를 얻어가려고 힘들게 애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그리고 화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내가 해석하는 것과 화자가 해석하는 것에 대한 고찰과 수용, 그리고 강연을 듣기로 선택한 내가 삶의 주체라는 것, 행복은 사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 작은 것들이 크게 다가오는지는 모르겠는데 오히려 이런 면이 내게 있어 감동을 주게 될지는 몰랐다. 어떤 것을 접하느냐에 따라 내가 바뀌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어찌 보면 높다. 부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 주변의 상황들이 몸과 정신에 바로 흡수되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것들을 마구 접하다 보면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져 누구보다 진심으로 살아갈 수 있다.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에만 주의하면 말이다.
피터팬과 햄릿으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성인기의 심바가 되어 보련다. 눈치만 보고 쉽게 포기해 버리면 햄릿에 나오는 대사처럼 남는 건 침묵뿐이다. 나도 더 성장하면 인문학 강연을 해보고 싶고 TED에 나와도 보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도움을 주는 일을 해보고 싶다. 내 능력이 그 정도가 되어야 하는 걸 알고 그 과정에서 수백 번 수만 번 넘어지더라도 나는 다시 일어나는 힘과 그 힘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재정립 과정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행복하다. 나에게 그런 의지가 있어서, 그리고 느리더라도 깨달아서 행복하다. 내 나이 겨우 21살, 뭐든 시작하고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할 수 있는 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 라이프 코드 강의에서는 큰 원 안에 있는 작은 원을 침범당하지 않는 것이 비결이라고 하고, 또 심리학 책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하는 말은 몸의 힘을 빼고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애매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의지는 생겼는데 몸이 잘 안 따라주는 것, 도전하고 싶은데 꺾이는 것, 겁이 많은 내 성격이 혐오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기에 나는 이걸 강점으로 만드는 연구를 계속할 것이다. 단점이 많다는 건 좋은 일만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극복할 게 많다는 뜻이니 미래에 얼마나 성숙해지고 멋진 사람이 될지 기대해 볼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안다. 이젠 패닉 상태에 빠지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눈치 보지 않는다. 앞자리가 2밖에 안 됐다. 많이 깨져보기도 전에 풀죽고 싶지 않다. 아니 어떤 나이가 되더라도 내가 중심축이 되고 싶다. 그걸 알아차리는 연습을 멈추지 말자.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방법을 찾자. 어두운 터널을 나와 걸어가는 내 모습에 찬사를 보내며 나는 강연 하나에 울고 웃었다.
어쩜 나에게 딱 필요한 강의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이, 고등학생 때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힘들었었다. 그때 어느 한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내 진로를 작가로 정했었다. 나는 문예창작과 학생으로 보낸 1년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중간에 서 버린 것에 대한 분노와 아픔이 컸을 뿐이다. 스스로 지는 것 같았다. 2학년 병이라는 희귀병이 생긴 것 같았고 고등학생 때 2학년 때 전학을 가버린 것이 생각났다.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 죄책감에 시달려 울면서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나 더 이상 가다가 서는 거 그만할래, 너무 지치고, 힘들어. 내가 미안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없이 울고 아팠던 건 내게 있는 병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에 있어서 무언가를 더 원하는데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직면하기 싫은 걸 직면하게 되는 때가 오면, 사람은 조급해진다. 하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다. Haste is waste. 조급할수록 돌아가는 게 좋은 이유를. 여유라는 아이를 챙겨야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과의 비교도 없애고 온전한 '나'로써 나아갈 수 있을 때,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된다. 강의에서 니체가 아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을 했다는 걸 배웠다. 그 순간, 윤하의 '바다아이'라는 곡이 떠올랐고, 사소한 것에도 행복해하며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핵심을 말하자면, 외롭고 힘들 때 누군가를 만날 여력이 없다면 책과 강의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만의 우울증 극복 테라피'에 넣어 놓아야겠다. 마음에 드는 강의는 첫 시작부터 feel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