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을 써보자면...
어제 '케빈에 대하여'를 동생과 같이 봤다. 같이 보면 안 되는 걸 안다. 하지만 요즘 중학생은 생각보다 성숙하다. 보면서 내내 동생은 영화를 멈추며 나와 토론을 했다. 원래 우리가 이러는 게 아니라 이 영화가 우리를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케빈이 살인자가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엄마는 저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게 맞나라는 생각을 하며 조잘대며 아주 시끄럽게도 영화를 봤다. 무엇보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우리들의 엄마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나는 솔직히 엄마인 에바가 불쌍했다. 물론 키우는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도 있었지만 세상에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는가. 이 생각을 하다가 잠깐... 이거 어디서 익숙하게 들은 것 같은데.... 아, 가족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엄마가 했던 말이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가 어디에 있는데, 부모가 신이야? 너한테만 다 맞춰주면 내 마음은 누가 봐주는데!!"
에바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내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민감하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과잉인 듯) 케빈처럼 삐뚤어지지는 않았다. 영화를 본 다음날, 영화를 추천해 준 같은 컴퓨터 ITQ반 언니에게 추천해 준 영화를 봤다고 얘기했다. 언니와 나도 그 영화에 대해 견해를 나누며 서로 공감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심리학적인 영화고, 연출이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리뷰들도 흥미로웠다. 배경음악과 연출의 분위기가 정반대인 것을 통해, 대비되는 색깔을 통해 '아이러니', 즉, 모순을 표현했다는 것과 그 모든 것이 전부 복선이고 그 복선, 즉, 떡밥을 나중에 잘 수거해 영화를 구성했다는 점이 박수를 칠 만했다. 한 마디로 작가가 너무 멋지다. 나는 인간의 감정의 양면성에 대하여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장면마다 나오는 복선들에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저 엄마와 아들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리고 양육환경 등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것이라고만 생각해서 거기에 매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끝부분에 다다를수록 나 또한 깨달았다.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인간이 벌인 일에 대한 원인은 한 가지로 규명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상황의 복잡성과 인간의 호르몬, 감정들의 혼합물 혹은 산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자신이 원하는 걸 희생해 버린 에바의 모습에서 우리 엄마 또한 보였다. 세상의 엄마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저버리지 않는 모습까지, 아니,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까지 다 닮은 듯하다. 하지만 자식문제는 어렵다고 그 부분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화를 통해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나와 엄마의 성격은 정반대다. 하지만 엄마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했고, 내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주려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오빠와 동생에게도 하지만 감정이란 것의 마찰로 엄마가 원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엄마는 투자한 만큼을 우리에게 바라게 되었지만 나는 나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며 훗날 효도하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나 또한 아직까지도 엄마와의 사이가 애매하고 쉽지 않다.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때로는 서로를 증오한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마찰이 극에 달했을 때 내가 택한 방법은 '자해와 자살시도'였다. 케빈은 타살을 택했다. 하지만 이건 부모의 잘못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조앤롤링이 하버드 연설에서 말했다. 성인이 되는 시점부터는 부모를 탓할 기간이 끝난 거라고, 그리고 그래봤자 소용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오은영 박사님은 말했다. 부모는 아이의 동아줄이라서 혹여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도 끝까지 잡으려 한다고. 부모 자식과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모를 탓하기보다 감사함을 가지는 게 나 자신에게도 부모에게도 좋은 게 분명한 게 틀림없다. 사람마다 사정은 다르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원망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들을 선택하며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나을 듯하다. 부모도 결국은 타인이다. 존중받아야 하며, 개인의 공간과 시간을 보호받아야 할 누군가의 자녀다. 엄마 아빠에게도 마음속에 각자 작은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우리가 바라볼 때, 너무 과민반응하는 건 아닐까. 물론 부모가 자녀를 위하는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훈육을 하는 것도 좋지만 원래 세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뿐더러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것처럼 부모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하지만 안 되니까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케빈은 첫째였다. 에바도 엄마는 처음이었다. 우리 엄마도 우리 오빠가 첫 아이였다. 오빠는 나와 동생에 비해 많이 맞았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엿한 어른으로써 직장에 다니고 우리에게 용돈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사과를 했고 오빠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억울함을 품지 않는다. 그러니 조앤롤링의 말대로 자신의 삶을 살려면, 과거 혹은 부모로부터 요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통찰을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돌보며 스스로 성장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영화의 끝에 케빈은 18살로 미국에서는 성인이 된다. 에바는 드디어 엄마로서의 책임이 끝난 것일까. 그녀는 이제 자유로울까. 알 수는 없지만 영화 끝에 나오는 환한 빛이 에바의 자유를 뜻하는 것임을 바라며 인상적으로 본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