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고 인정한 것들의 도움
세상에는 나보다 잘나고 멋지고 예쁘고 돈 많고 학력도 좋은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내 고등학교 동창들도 있겠지. 한동안 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 연락을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는 인간관계도 공부도 다 다시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리셋 증후군은 자기 방어 기제였다. 하지만 사실 고등학생 때가 항상 나쁘기만은 했던 것이 아니다. 아니, 사실 너무 좋았던 부분들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내가 대회를 나갈 때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 줬던 친구들, 배울 점이 많고 함께 팀을 이루어 영어로 발표를 할 때마다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멋지고 착한 친구들이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동시에 심각한 열등감도 느꼈기에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선생님들은 그런 감정이 나중에 지나고 보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지만 나는 그 감정을 다루어 내는 게 정말 힘들었다. 대학만 가도, 사회에 나가면, 여전히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하나하나 다 나 자신과 비교하면 나는 내가 만든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 때는 괜찮다고, 학교가 뭐가 중요하냐고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적게 들인 노력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나는 도망쳤다. 도망쳐서 갈 수 있는 낙원은 없었고 그걸 몸소 경험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내 주위에 있는 나보다 잘난 친구들 때문이 아니라 힘듦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나 자신이었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밉고 쪽팔려서 내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싶었다.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들 말한다. 맞다, 나는 때론 행복했고 때론 슬프고 괴로웠다. 내 타고난 기질을 저주했고, 나 자신을 학대했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만들었다. 나만 왜 이 모양인지 왜 모든 걸 나는 다 어렵게 만드는지, 나 자신이 멍청한 것 같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하지만 그 끝까지 가고 난 후 내가 항상 느낀 것은 내가 느낀 괴로움은 근거 없는 허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기불안이었다. 엄마는 항상 내가 뭐든 덤벙거리고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말해왔고 나는 그걸 믿었다. 크게 보면 나는 이루어낸 게 없기에, 하지만 작은 부분을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에게도 매력이 있고, 강점이 있었다. 그저 잘하고 싶어서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가 그 좋은 점들을 전부 덮어버리며 살 뻔했다.
참 아이러니 했다. 이 삶은 내가 사는 것이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영향을 끼친다는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고등학생 때 나는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세지만 정작 그 욕심과 자격지심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는 게 없었다. 지키지도 못할 무리한 계획을 세워서 밤을 새워도 다 해내지 못해서 자책했고, 그런 나는 사회에 나가서도 패배자가 될까 봐 두려웠다. 실은 삶에 있어서 승리도 패배도 없는 것이었다. 내 삶인데, 내가 왜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로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담 선생님은 그건 사회와 부모님이 만들어낸 사고지, 나의 사고가 아니라고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혼동이 왔다. 지금까지 내가 원했던 것들이 내가 진짜 원하는 것들이 아니었던 것인가. 좋은 학점, 좋은 대학, 좋은 커리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것, 누구에게 대놓고 강요받은 적은 없는 것 같아도 조금씩 주입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다 내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고, 노력도 더 하지 않는 주제에 왜 바라는 건 많은지 짜증을 부렸었다. 문득 초등학생 때, 내내 영어 말하기 대회만 나가면 금상을 받고, 전국 대회에서 3등도 했는데 어떤 사설 대회에서 참여상을 받은 게 기억난다. 이유는 초등학생이 쓸 수준의 대본이 아니라며 어른의 개입을 의심받아서였다. 나는 그때 내 결과에 승복할 수가 없어 차에서 한참을 울었다. 내가 노력했던 과정도 다 내 건데 결과만 보고 괜히 준비했다며 투덜거리는 철부지. 바라는 게 너무 크면 때론 현실에 의해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난 달라졌다. 나보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의 노력은 닮고 싶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내가 그보다 못하다고 해서 나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 존경하는 사람과 같은 복제인간이 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비교는 어제의 나와하는 게 맞다. ‘스터디 코드’의 코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생은 상대평가가 아니고 절대평가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돌아보고 수정해서 나아가면 된다. 옆 사람이 더 빨리 나간다고 조급해지면 잘하고 있던 것도 망해버린다.
생각해 보니 내가 성과를 가장 잘 냈던 순간들은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에게서 맘 편하게 배울 때였다. 질투, 시기, 열등감 다 필요한 감정이지만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잡아먹히면 수렁으로 빠져들기에 내가 주도권을 잡고 써먹어야 한다. 그냥 인지하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다시 연락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안부를 건네니 나를 막상 안 좋게 생각하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한결같이 나를 응원해 주었다. 보아라, 내가 만든 수치심과 자격지심은 모두 허상이지 않은가. 엄마는 내게 위로를 해주고 위안을 주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아니어서 그냥 좋은 말만 해주는 거라고. 엄마니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따끔한 말이 나가는 거라고 했다. 그건 엄마만의 방식이니까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타인의 호의를 의심하게 되었다. 칭찬을 해줘도 고맙다고 해줘도 힘내라고 해줘도 다 가식으로 느껴졌고, 세상이 팍팍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진심이 느껴질 때는, 의심과 편견이 깨진다. 외국어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되어 나중에 나와 연락할 때 속으로 나를 무시하거나 한심하게 여길 거라는 착각, 내 모든 친구들이 내 배경을 알게 되면 나에게서 멀어질 거라는 착각, 아주 단단한 착각이었다. 사실 부러워도 했다. 나보다 좋은 대학을 간 친구들을 잊고 싶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힘들다 하면서도 끝까지 남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내 안의 결점이 내 마음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왜 난 안 되는데. 왜 이렇게 유리멘탈인 건데, 도대체 뭐가 더 모자라서.’
그 이유는 내 ‘삶의 포커스’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더 나아가서 세상에게 맞춤설정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열심히는 하는데 결과는 최악인 그저 옆의 친구들의 동기부여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매사에 느리고 굼뜬 게 싫어서 성격이 급해졌고, 나는 여유로워지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느린데 남들보다 3 발자국은 더 멀리 가 있어야 나중에 같은 위치에 서 있을 거라고. 나는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였다. 하지만 단기간에 성취감을 얻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 거북이였다. 차근차근은 절대 내게 성공을 가져다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에 가서 나만의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얼마냐 대단하느냐’는 내게 이제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최선을 다할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최선의 기준도 이제는 내가 정한다. 자격증도 내가 따고 싶은 것만 딸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노력들이 나중에 의도치 않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추구하는 삶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도 여유 있게 대하며, 배울 점은 배우고 나 자신의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을 것이다.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은 배움이며, 나는 이제 내 삶 살기에 바빠서 본능적으로 발동되는 비교에 지쳤다. 엄마는 너무 답답해하며 사주를 보러 갔고, 나는 평생 스스로를 들들 볶아댈 사주라고, 나무에 열매는 많은데 양분을 주는 흙이 너무 적은 형상이라고 했다. 사실 안 믿는다. 그저 엄마가 얼마나 답답하면 오죽해서 내 사주를 보러 갔을까 생각할 뿐이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많은 것을 쏟아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목표를 못 이룰까 봐 없애지는 않는다. 아직도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내 필력과 상관없이 주변에서 뭐라 하든 부업이라도 하고 싶다. 내 인생이니까, 내가 주체가 되는 게 당연한, 그럴 권리가 있는 내 인생이니까. 마음을 너무 닫고 살았던 건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이제껏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그것들이 내 마음에서 삐져나오면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충동적이었고 극단적인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여유를 챙기고 나면, 그런 감정들을 충분히 내가 돌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렇게 해내고 나면, 어떤 것에 큰 가치를 매길지는 나한테 달려있고,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은 성과주의자가 아니라 과정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로웠고, 거기다 감수성이 풍부해서 자주 좌절했다. 부모님도 가끔은 원망했고, 그렇게 타인을 원망하는 나 자신을 저주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니 타인에게 가지는 감정들은 긍정적으로 변했다.
엄마와 성격이 닮은 사람들을 불편해하고 싫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 그냥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웃으며 친하게 지낼 수 있다. 이런 게 여유라는 걸까. 과거의 나는 너무 예민했나 보다 하고 그냥 거기서 딱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된 게. 눈물이 많고 예민한 나는 허무주의자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이 너무나 많았고 그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제대로 그 일을 해내지 않았다. 무슨 고집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나는 목표설정을 확실히 하고 하기 싫은 일을 그나마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때로는 모르는 것들에 대한 답을 무조건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중 하나가 인생이고 어른이 되는 매뉴얼이다.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 정해진 것이 없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허상이자 타인의 생각일 뿐이다. 참고는 좋지만 끌려가면 안 된다. 인지만 하고 있어도 열등감은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동안 피해왔던, 그리고 고마웠던 사람들이 내 책을 보게 된다면, 내가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 도망치느라 그랬던 거라고 알아줬으면 좋겠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몇 명 빼고는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사실 내가 도망쳤던 것들이 그립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후회는 없다. 다 내가 성장하는데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얻은 게 뭐냐고 때로는 질타를 받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들에 일일이 상처받지도 않는다. 현재를 사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내 오빠도 이런 시기가 있었고,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장기가 안 좋아져 수술을 받은 적도 있었다. 탈모도 오고 자존감도 낮아졌던 때에 나는 오빠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고집도 세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 맞다고 우기는 ‘피터팬’이었기에. 그래서 철없게 행동해서 오빠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나중에는 다 극복하고 열심히 악착같이 살아가는 오빠를 존경했다. 조언을 가장 많이 구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취업한 오빠가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게 살아온 오빠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동생 과외를 엄마가 대충 해도 된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는 건 내가 받는 돈에 대한 책임을 지고도 싶지만 동생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나중에 발목이 잡혀 막히게 될 때 과거에 하는 후회 말이다. 지금 동생 영어 실력을 보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지만 어느 정도 책임을 느낀다. 오빠와 내가 부모님의 돈을 공부에 다 갖다 써서 자신은 학원도 못 가니 어쩔 수 없다는 허무맹랑한 변명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말로 다가왔다. 생각이 깊고 많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대신, 한 없이 구덩이로 사람을 끌고 가기도 한다.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만, 동굴로 들어가서 힘들 때, 다시 나오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나쁜 것이 아니며 틀린 것도 아니다. 그냥 성향일 뿐이다. 좋은 쪽으로 사용하면 좋은 것이다.
그냥 그렇다고 이해하면 성격에 대한 열등감도 사라진다. 누가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물어볼 때, 나는 무엇 무엇을 좋아하는 그냥 나입니다.라는 소개가 가장 보편적인 소개가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오늘도 나 자신을 예쁘게 채워나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