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보다는 좋은 기억 때문이다
소속감이 없으니 쓸쓸하다, 3일 뒤면 내가 갈 새로운 대학이 정해지겠지. 사실 기대는 안 한다. 다 상향으로 넣고 지금 최하향 하나만 발표가 나온 상황이니까.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기적이다. 과거에 붙잡혀 있는 기분이다. 존경하던 교수님께 연락을 그만할까 생각하다가도 신년이 되기 전 안부를 전하고 싶어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 스승으로 남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떠나는 학생을, 그것도 지금 남은 학생들 관리하기도 힘들 교수에게 이기적으로 군 건 아닐까 싶어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연락을 할 사람들은 이민을 가도 한다고 한다. 이제야 용기가 생겼는데 그 긴 암흑을 헤치고 나오니 잃은 것 또한 너무 많다. 과거를 완전히 놓지 못하면 앞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 내 내면을 조용히 되짚어보고 관찰해 본 결과, 내가 과거를 못 놓는 이유는 힘들었던 기억보다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스무 살은 나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벅차고 행복한 시기였다. 내가 원하는 걸 배우고, 감동을 받고, 존경하는 어른이 생겼다. 내 능력을 좋게 봐준, 부모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한 것을 인정해준 어른이었다. 글에 대한 나의 발전가능성을 봐주신 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곳에 가면 더 이상 내 스승이 아닌 걸까. 교수님은 마침표를 찍고 앞으로 나가라고 하신다. 내게 선을 그으신 건 아닌가 또다시 과잉정신활동이 말썽을 피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될 텐데 그저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갑작스럽게 아무런 상담도 청하지 않고 그냥 떠나버린 학교, 그간의 1년을 버려버렸고, 도망쳤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내게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주신 분은 교수님이셨다. 여전히 언제든 책을 보내주겠다고 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내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고 그 뜻을 담아 내 원고를 교수님께 드렸다. 교수님은 읽고 나서 따뜻한 위로를 전해 주셨다.
나는 그분의 수업을 좋아했다. 내가 했던 고민들이 전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책을 통해 관점을 넓히는 법을 알려주신 분이다. 지금 와서 계속 끝까지 스승으로 남아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잊히고 싶지 않았다. 문학에 발을 담갔던 나 자신과 강의실에서 동기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던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과거는 과거지만 어떤 과거는 너무 좋아서 기억 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동기들도 다 착하고 다정했다. 여전히 연락을 이어나가고 있는 친구도 많다. 내가 떠나고 나서 나를 그리워해주는 친구들도 있었고, 다시 연락을 하니 되려 고맙다고 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가끔 좋았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나타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나는 이제 거기에 없다. 그곳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이제 학교로 가면 나는 외부인이다. 과거의 나는 여전히 인문예대 문 앞에 서있다. 과제를 프린트하러 지갑과 USB를 들고 온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그랬듯이 나는 이제 그곳에 서 있으면 안 된다. 나아가야 한다. 떠나서 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이제는 과거도 나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피하지 않으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법을 터득했기에,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 다만, 이제는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지 않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안 좋은 기억이 아니라 떠난 곳에서의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행복이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미련한 짓을 반복하다가 겨우 떠나보내고 잘 마무리 지었다 합리화한다. 그렇게 해야 과거를 떠나보낼 수 있기에. 너무 좋았던 기억들과 그로 인해 생겨난 욕심과 인정욕구, 만났던 좋은 인연들, 전부 나의 일부로 삼고 새로운 나를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가려 한다. 이렇게 조금 더 단단해지는 거겠지. 앞으로도 연락을 이어갈 것이다. 더 이상 열등감이나 파괴적인 외로움에 몸부림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이 독이 되지 않게 잘 펴서 내 기억의 파일에 곱게 넣어두려 한다.
아직 마음속에 남아있다. 아직도 어제 같다. 내가 자퇴를 한 날과, 죽으려 했던 날, 작년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때론 아프고 외면해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소중했던 건 나에게 있어 사라지면 안 되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려 여러 가지를 보관해 두었다. 정리할 건 정리하고 남겨둘 건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 머무르면 절대 미래로 향할 수 없다. 알지만 과거를 일부로 만들고 같이 가지고 갈 수는 있다. 그렇게 해보려 한다. 그 무엇도 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한 채, 자양분으로 삼으면서 좋은 것들로 승화시켜 보려 한다. 촛불시위를 평화롭게 이끌어 가면서 분노와 상실을 좋게 승화시키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아팠던 순간을 윤색해보려 한다. 그렇게 남길 바라기 때문이고, 실제로 2023년은 내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년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더욱 단단한 내가 있게 해 준 힘들고도 행복했던 모든 시간을 나는 아낀다. 그렇기에 현재의 나도 아낄 수 있다. 되돌아보진 말되 챙겨 다니자. 그러다가 바닥에 떨어지면 얼른 주워서 먼지를 후후 불어버리며 다시 주머니에 넣고 걸으면 된다. 굳이 심하게 망가졌는지 볼 필요도 없고 간직만 잘해서 나중에 내가 또 행복해질 때에 가끔씩 꺼내볼 수 있으면 그땐, 눈물보다 미소가 만연할 시기일 때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