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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찾은 공부방법과 과외준비

따로 추가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해 보자

by 몽도리

과외는 2학년 때부터 하기로 했다. 내가 준비가 잘 안 됐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선 스케줄 관리를 해야 하는데 현재는 그냥 되는대로 살고 있다. 해야 하는 것들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해치우고, 다른 걸 하기로 계획했던 것들은 미루게 되었다. 또한 나는 영어 자체에 대해서는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지식이 부족했다. 어김없이 영미문학개론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느꼈듯이 배우면 배울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모르는 단어도 많거니와 문체가 너무 어려웠다. 그런 1학년들을 위해서 교수님은 한 문장씩 일일이 번역해 주셨다. 교수님이 말하시는 챗 지피티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을 해주신 것이다. 그러면서 문학적 감수성과 문해력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 부분에 있어서는 능력이 생기다 말았다는 것을 문예창작학과를 다녀보고 자퇴한 후,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는 문학적 재능이 없다. 그저 조금의 창의성과 언어에 대한 능력, 민감성 등을 재능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 깨닫게 되어 큰 충격이었다. 받아들이기까지 1년 이상이 걸렸고, 다시 선택하게 된 이번 학과가 썩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영어영문학과도 결국 인문예술대학에 포함되어 있다. 원래 배웠던 것들을 영어로 배울 뿐이었다. 물론 다 똑같진 않지만 영어를 알아듣고 쓸 줄 안다는 것 빼고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겐 그간 배우며 쌓아온 문학적 지식도, 독서도 전부 다 새로 체계를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었다. 언어 자체가 바뀌면 그에 따른 문화와 관련 지식도 상이해진다. 한국 문학과 서양 문학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전체적인 맥락은 문학이니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만 그저 문체와 사용하는 어휘 등만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다 사람이 창조하는 예술이라는 점은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는 존재는 살아온 환경과 배경에 따라 완전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서양문학에는 신학과 심리학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온다. 개인의 정체성, 내면, 자율성 등이 대체로 주제라면 한국 문학은 공동체적 성향이 강하다.

또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절제하고 역사적 사건이 문학 속에 많이 녹아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서양 문학에는 역사적 사건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대표되는 작품들 몇 개만 다루었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전부 내적 갈등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스토리, 즉, 줄거리는 그 내적갈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기승전결이고 그냥 철학과 심리학 박사면 다 알 것만 같았다. 배경지식이 엄청 많이 먹고 들어갈 과목처럼만 보였다. 또다시 좌절이 찾아왔지만 이제 나는 돌아갈 구석도 뻗을 자리도 없다. 좋건 싫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곧 개시하게 될 과외를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다. 이 길로 가기로 마음먹었으면 등록금을 내고 얻기로 한 지식이면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간직했다가 마음껏 나눌 정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싶다.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요즘에는 스터디를 두 개나 만들어서 가장 힘들다고 생각되는 두 과목을 나름 수월하게 공부하는 중이다. 집단지성을 활용한 이 공부방법은 내가 즐겨 쓰는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무조건 공부는 혼자 했었다. 스스로 자존심도 세고 같이 하면 기가 빨린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변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스터디를 만드는 게 좋을 거라고 추천도 해주시고 실제로 대학에서 막막한 부분은 상의를 통해 해결하는 게 빨랐다. 서로 놓친 과제나 공지가 있으면 챙겨주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니 같은 동기인 동생들과 쉽게 친해질 수도 있었고 나도 모르는 부분을 잘 체크할 수 있었다. 체력 소모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난 때론 체력소모를 해야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점점 누구를 만나서 공부를 하고 싶어 졌고 내가 설명하는 걸 못 하지만 좋아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잘하진 못해도 좋아하게 된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다.

예전에는 내가 못하기 때문에 싫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실수를 하더라도 하는 과정 자체를 싫어하진 않는다. 재밌고 좋다. 그렇기에 과외도 자신이 있다. 직접 부딪혀서 내가 앞으로 만들 실수에 더 이상 좌절만 하고 있지는 않게 됐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필요한 관대함일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니까 지식을 채워 넣는 것이지 내가 다 알면 대학에 있을 필요가 없다. 가르치는데 필요한 자양분이 대학에 분명 존재하고 있다. 내 미래에 100%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가까운 미래, 즉, 과외에는 끊임없는 자극을 주고 있는 게 현재 대학 공부다. 그러니 과외대비는 다른 것을 너무 추가하는 것보다 공부 자체에 집중해 보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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