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자아
그렇게 몇 천년이 흘렀고, 자현과 정화는 인간들 사이에서 심리학 박사로 유명을 떨치고 있었다. 수천년 동안 인간들의 슬픈 마음과 괴로운 마음을 치유해주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유지시켜 주었으며, 벼량 끝에 있는 인간들에게 예쁜 꽃을 주며 설득시켰다. 그들은 차라리 인간인 척을 하며 그들을 돕기로 하고 선비와 의녀, 먼 훗날에는 부부 심리학 박사로 거듭나면서 인간들을 도왔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던 부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간들 머리위에 떠다니는 요괴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MBTI 였다. 항상 정의내리기 힘들었던 부분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한 심현은 각각의 요괴들을 유리상자에 가두어 구분했다. 이제 부부는 사람들의 MBTI를 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자신들의 MBTI는 절대 알 수 없었다.
부부는 낮에는 그냥 평범한 박사들처럼 보였지만, 밤이 되면 신으로써의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MBTI를 자신들의 눈에 보이게 만들어 최대한 갈등을 줄이고자 사용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MBTI에 맞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들의 업무, 사랑 등 모든 것을 이에 맞춰 결정해주기 시작했다. 이전에 권세를 떨치던 막강한 신들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자, 다 사라지고 말았다. 성격의 신과, 감정의 신은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들 중 두 명이었다. 자신들이 살아남은데는 이유가 있다고 확신한 그들은 인간들의 갈등을 없애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기로 하고, 오랜 세월동안 자신들의 능력을 써서 유안평국을 안정된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과정에서 안정감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격이 바뀌지 않게 철저하게 관리했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 도전 정신이 줄고 위기에 면역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예쁜 딸을 낳게 되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딸은 MBTI를 알 수 없었다. 이 아이는 호기심이 대단했다. 이 점이 부부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들은 딸의 이름을 심화(深化)라고 짓고, 애지중지 키웠다. 하지만 엄청난 과잉보호를 했으며 그녀의 행동반경을 제한시켰다. 어찌보면 그들의 가장 막강한 적은 자신들의 딸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심화는 부부가 하는 일에 자꾸 방해가 되었고, 부부는 항상 딸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반쯤 포기한 정화가 말했다. "이 아이는 호기심의 신이 아닐까. 우리가 호기심이란 감정을 인간들로부터 없애버려서 이렇게 된 것만 같아."
심현이 말했다. "호기심은 독이야. 인간들이 호기심을 많이 가지기 시작하면서 부터 갈등 빈도수가 올라가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어."
부부의 입장차이는 점점 커져갔다. 정화는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감정들을 사랑하고 싶었고, 평안한 나라를 유지시키기 위해 인간들의 감정을 가두어두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화가 말했다. "안 되는 거 알아. 그래도 난 분노, 좌절, 슬픔, 허망감, 이 애들이 불쌍해. 인간들에게 필요하니까 있는 거 아닐까? 호기심도 포함해서." 심현이 말했다. "그 감정들을 풀어놓는 순간,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세계를 위해 해왔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아." 정화가 말했다. "심현, 우리가 인간들을 돕기로 한 건 우리가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야. 충분히 자아실현을 했으니까 어느정도 성격과 감정에서 자유를 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우리가 너무 오래 손을 대고 있었어."
심현이 말했다. "우리가 신들 중 살아남은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 다시 아무것도 할 것 없는 무기력한 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우리의 자아실현은 우리가 소멸될때까지 계속 되어야만 해." 정화가 말했다. "그러면 심화도 평생 가두고 살거야? 언제까지 통제할 수 있는데? 우리 딸도 이렇게 통제가 안되는데 어떻게 이 많은 인간들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 너 또한 지금 니가 가진 감정을 외면하고 있어. 욕심과 미련이 선량함과 부드러움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심현이 말했다. "난 그래도 지금이 좋아. 나를 버린 부모와 나를 멸시하던 다른 신들이 있던 그 시대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럴려면 가치가 있어야 하고, 실현을 해야 해."
심현은 정화에게 딸에게서 호기심을 계속 거두라고 말했지만, 정화는 그저 딸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다. 심화는 자라면서 계속 세상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일하면 안 되는 거지?' 성인이 된 심화는 부모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혼자 세상으로의 탐험을 떠났다. 딸의 편지를 읽은 부부는 심히 걱정이 되었다. 심현은 딸이 자신이 유지시킨 세계를 어떻게 해버리진 않을까 늘 불안해했고, 정화는 딸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늘 조마조마했다. 정화는 딸보다도 자신의 업적에 더 집착하는 심현을 보고 못마땅해했다.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되었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