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10
서울에는 시흥동이 있고, 경기도에는 시흥시가 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지역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름은 같지만 두 지역은 전혀 다른 공간이다.
이 차이는 과거 시흥군의 해체 과정에서 비롯됐다.
시흥군은 1895년부터 1988년 말까지 존속한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금천구 영등포구 관악구 구로구와 경기도 안양 등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시흥동은 이 시흥군의 군청 소재지이자 읍내였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한강 이남에서 서울과 지방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에는 관아와 향교가 들어섰고, 정조 때에는 수원 능행길을 위한 행궁이 설치될 정도로 행정적·상징적 위상을 갖추었다.
군청의 이동, 읍내의 이동
1895년 시흥군 설치 당시 군청은 시흥동에 자리했다. 그러나 강제병합 이후 일본인들의 경제 활동 중심이 제물포와 경성 사이 영등포로 이동하면서, 시흥군청도 영등포로 이전했다.
이로써 시흥동은 행정 중심의 지위를 상실했고, 시흥군의 실질적 중심은 영등포로 옮겨갔다.
1936년 영등포가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또 한 번의 단절이 발생한다. 해방 이후 군청은 안양, 소래읍으로 이전했고, 시흥군은 서울의 팽창과 맞물려 반복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겪었다.
1963년 서울시 확장으로 시흥군 시흥리가 서울에 편입되면서 ‘시흥’과 ‘영등포’가 모두 빠진 기형적인 시흥군이 남게 된다. 이후 안양·광명·안산·과천 등이 차례로 시로 승격되며 분리되었고, 1988년 말 시흥군은 완전히 소멸했다.
현재의 시흥시는 구한말 기준으로 보면 본래 인천, 안산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이름만 이어받은 셈이다.
금천구의 탄생과 옛 읍내의 복귀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해 금천구가 신설되면서 시흥동·독산동·가산동이 하나의 자치구로 묶였다. 이 과정에서 옛 시흥군 읍내였던 시흥동에 금천구청이 들어서며 행정 중심지 기능이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금천구청 앞을 지나는 시흥대로는 우리나라 1번 국도의 한 구간이다. 이 길 위에 남아 있는 공간의 흔적은 이 지역이 단순한 변두리가 아니라, 한때 광역 행정과 유통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독산동 우시장의 형성
독산역 인근에는 지금도 운영 중인 축산물 유통시장, 독산동 우시장이 있다.
서울시는 1960년대 말까지 이어지던 불법 도축과 비위생적 쇠고기 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흥역(현 금천구청역) 주변에 흩어져 있던 소규모 우시장과 노점상을 독산동으로 이전·정비했다. 이 시장은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나 그 뿌리는 훨씬 오래되었다.
전통적으로 우시장은 소·돼지 등 가축을 거래하는 상인과 거간꾼이 모이고, 장터·주막 등 편의시설이 갖춰진 교통 요지에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한때 경기도 최대 면적을 관할했던 시흥군의 읍내에 우시장이 자리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마장동과 무엇이 달랐는가
그렇다면 마장동 우시장과의 차별성은 무엇일까.
마장동 우시장은 1960~70년대 도심 정비 정책의 일환으로 난립하던 우시장과 도축장을 이전·집적해 조성한 공영 축산물 시장이다. 도축과 육류 유통을 전제로 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며 전국 단위의 대규모 축산 유통 거점으로 성장했다.
반면 시흥 우시장은 시흥군 시절부터 형성된 농촌형 시장의 성격을 지녔다. 넓은 군 지역에서 농사에 필요한 살아 있는 소를 거래하기 위해 사람들이 군청 소재지 주변으로 모이며 자연스럽게 성장한 장터였다.
결과적으로 시흥 우시장은 ‘소의 거래’가 중심이었고, 마장동은 도축과 소비를 위한 ‘육류 유통’이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기능과 성격이 분명히 갈렸다.
시장이 말해주는 시흥동의 기억
독산동 우시장은 단순한 재래시장이 아니다.
이 시장의 존재는 시흥동이 한때 광역 행정의 중심지이자 유통의 거점이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흔적이다.
소를 이용한 농사가 사라진 현재 살아있는 소 거래시장은 사라졌지만 육류 유통시장은 남아있다.
과거의 행정구역은 사라졌지만, 시장은 남아 여전히 그 위상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서울은 주변의 중심을 흡수하면서 확장된 도시이고 과거의 중심은 서울의 주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