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9
청계천은 서울 한가운데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지금은 도심 속 산책로이자 하천 복원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장면이 보인다.
청계천은 마치 청계광장에서 시작하는 하천처럼 보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작은 물줄기가 모여 큰 개천을 이룬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상류가 보이지 않는다. 도심 한복판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개천처럼 느껴진다.
왜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하나의 건물, 두 개의 구청
세종대로 사거리, 이른바 광화문 사거리, 청계광장 바로 맞은편에는 특이한 건물이 하나 있다. 광화문빌딩이다.
이 건물은 한때 두 개의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
옛 주소로는 ‘종로구 신문로1가 150번지’이면서 동시에 ‘중구 태평로1가 68번지’였다.
건물 하나가 두 개의 행정구에 속했다는 이야기다.
1975년 이 일대는 신문로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종로구와 중구의 개천변 경계에 있던 작은 건물들, 국제극장과 감리회본부 건물이 헐리고, 개천은 복개되고 두 필지가 통합되어 하나의 대형 건물이 세워졌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은 세종대로 사거리의 상징성을 고려해 낮은 건물 두 채보다 하나의 고층 건물을 제안했다고 한다.
1991년, 지하 5층 지상 20층의 건물이 완공되었다.
문제는 관할이었다.
종로구와 중구는 서로 자기 구역이라 주장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상징성, 그리고 세금이었다. 재산세와 취득세, 주민세 등 지방세 수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논란끝에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지하부터 12층까지는 종로구, 13층부터 20층까지는 중구.
하나의 건물이 층별로 다른 구에 속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현재 도로명 주소는 ‘종로구 세종대로 149’로 통합되었지만, 세수는 여전히 지분대로 나누어 징수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의 경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자연의 선이 아니라, 행정과 이해관계가 그은 선으로.
사라진 개울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은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왕, 북악, 낙산, 목멱(남산)
이 산들에서 흘러내린 작은 개울들이 도성 안으로 모여들어 청계천을 이루었다.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여지도 속 도성도를 보면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한양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옥류동천, 백운동천, 사직동천 같은 작은 개울들이 서촌과 세종마을을 지나 정부서울청사와 광화문 사거리 일대로 흘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이 개울들은 대부분 복개되거나 매립되었다. 물길 위에 도로가 놓이고 건물이 세워졌다.
광화문빌딩이 서 있는 자리 역시 과거 물이 지나던 길이었다.
복원된 물, 인공의 수원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청계천이 청계광장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게 된다.
메마른 자연 물줄기를 대신해서 복원 이후 청계천은 하루 12만톤의 물을 성동구 자양동 취수장에서 끌어온 한강물과 인근 지하철역 주변에서 발생하는 유출 지하수를 모아 공급한다. 자연 발원지가 아니라 도시 인프라가 유지하는 수원이다.
그래서 계절과 관계없이 일정한 수량이 흐른다.
1급수 어종이 살 만큼 깨끗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 하천의 결과라기보다, 도시가 설계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이 우선인 도시 서울
청계천이 거기서 시작하는 이유와
광화문빌딩이 두 개의 구에 속했던 이유는 결국 같다.
서울은 물길 위에 세워진 도시가 아니라
물길을 지우고 다시 설계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흐름보다 행정의 경계가 우선했고,
지형보다 이해관계가 앞섰다.
그래서 서울은 이렇게 생겼다.
청계천의 변화
청계천은 조선시대에는 빈부를 가르던 경계에서. 한국전쟁이후 빈민들의 집단 거주지로, 산업화시대에는 속도의 상징인 고가도로로, 2000년대 이후 친환경적인 도심속 시민 휴식공간으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며 다시 태어났다.
같은 자리, 다른 시대.
도시는 기억을 지우고 다시 쓴다.
청계천은 자연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걷는 청계천은 자연의 시작점일까, 행정의 시작점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