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은 있는데, 왜 남대문역은 없을까

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8

by 김지웅


보통 지하철이나 철도 역명은 그 지역의 랜드마크나 상징성을 고려해 정해진다. 시청역, 홍대역이 있으며, 서대문역과 동대문역도 있다. 그런데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인 남대문(숭례문) 이름을 딴 역은 없다.


“왜 남대문역은 없을까”

원래는 있었다, 남대문 정거장

사실 남대문역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한강철교 완공후인 1900년 완전 개통되었을 당시 노선을 보면, 고종이 거처하던 덕수궁 인근, 오늘날 이화여고 서북쪽 부근에 종착역인 경성역이 있었다. 그 이전 구간에는 간이역 성격의 남대문 정거장과 용산 정거장, 노량진역이 차례로 설치되어 있었다.


중앙역의 이동, 의도된 선택

국권 침탈이 본격화된 1905년, 일제는 경성역의 이름을 서대문역으로 바꾸고 기능을 축소했다. 대신 새로 증축한 남대문역이 중앙역 역할을 맡게 하였다. 1919년에는 서대문역이 아예 폐쇄되었고, 1925년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한 남대문역의 명칭을 경성역으로 바꾸며 공식적인 중앙역으로 자리매김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철도 행정상의 조정이 아니었다. 중앙역의 위치를 옮긴다는 것은 곧 도시의 중심을 재편하는 일이며, 이는 일제의 강력한 ‘조선왕조 지우기’ 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의 정치·경제 중심은 광화문 경복궁을 축으로 한 육조거리, 그리고 청계천 북쪽 종로의 육의전 거리였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그 위쪽에는 왕족과 고위 관료, 권문세가들이 살았고, 남쪽에는 몰락한 양반과 서민들이 주로 거주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 본토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새로운 기회를 찾아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거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청계천이남, 충무로·명동 등 남촌 지역에 먼저 정착하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식민 지배를 본격화하면서 이들 일본인 거주지를 우선시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일제 강점기 도시계획의 중심, 명동과 남대문

일제는 새로 만든 경성역을 기점으로 명동과 남대문 일대를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 중심 시가지로 육성하고자 했다. 청계천 북쪽으로는 총독부 청사를 광화문에 세워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정면에서 가린 것을 제외하면, 주요 공공기관과 금융·상업 시설 대부분은 청계천 남쪽에 배치되었다.


현재 일제강점기 시기 근대건축물로 남아있는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전기(현 한국전력 서울본부),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등이 모두 이 일대에 들어섰다. 미츠코시 백화점(현 신세계)을 비롯해 조선인 박흥식이 세운 화신백화점을 제외한 주요 백화점들 역시 명동에 집중되었다. 남산에는 신궁과 라디오 방송국, 통감부 청사가 들어섰고, 도로 포장과 가로등, 상·하수도 같은 근대화된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이 지역에 집중되었다.


북촌의 몰락과 흔적

반면 원래의 중심지였던 종로와 북촌 지역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궁궐 훼손이 이어지면서 왕실의 권위는 무너졌고, 전기·도로·상하수도 등 생활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외면되면서 주거 여건은 남촌에 비해 갈수록 낙후되었다. 일제 치하 몰락한 조선의 명문가들은 집안 보물을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그 결과 인사동 골동품 골목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집을 팔고 떠나는 경우가 늘었고, 전통 한옥을 허물어 대지를 잘게 나누어 지은 이른바 개량한옥이 북촌에 남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북촌 한옥마을의 이면이다.


만약 조선왕조가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끌었다면, 서울의 중심축은 아마도 광화문과 종로를 따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사라진 이름, 남대문역

1925년 완공된 경성역은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장식한 돔 형태의 웅장한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일제는 이를 통해 식민 통치의 위엄과 ‘자신들 덕분에 조선이 발전했다’는 정당성을 과시하고자 했다.


그렇게 조선의 남대문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인위적으로 재편되었던 도시의 흔적들은 오늘날 서울의 도시 구조 속에 타의에 의해 강요되었던 역사의 잔재로 여전히 남아 있다.


다음 글은 원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그 기억을 잃어버린 <시흥>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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