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의 계보 #1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미술은 조각과 건축을 주축으로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현전하는 회화 작품의 수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탓이다. 프레스코 벽화나 도기 표면의 그림, 소수의 지류 및 직물 페인팅 등에서 고대 회화의 뛰어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남아있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지는 않은 편. 그래서 고대의 미술이라 하면 막연히 반쯤 허물어진 건축물과 조각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폐허가 된 유적지를 떠올리게 된다. 수천 년 간의 산화와 풍화를 겪은 예술품은 종종 알아보기 힘든 형태가 되곤 하지만 고대의 유물들은 폐허 속에서도 신비로운 아우라를 뿜어내며 덕후들을 끝없이 유혹한다. 현대 기술로 지은 건축물도 때론 무너지고 고급 용지도 파일철 없이 들고 다니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지는 판에 고대의 신전들이 당당하게 서 있는 자태나 이집트의 파피루스(심지어 식물 원료임을 생각해보라)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새삼 신비로운 감각에 사로잡혀 한숨을 토해내고 마는 것이다.
이집트, 신들의 영광과 영원불멸의 2D 이미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 일찍이 찬란한 문명이 발아한 근동 지역에서는 고대부터 신(神) 중심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태양이 무자비하게 작열하고 파라오처럼 신격화된 전제군주의 지배 하에서 미술은 인간이 아닌 신을 찬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옛 오리엔트 땅에서 태동한 위대한 문명, 신비롭고 종교적이며 마법과 같은 고대 이집트의 미술은 수천 년 동안 거의 유사한 양식을 유지하며 변하지 않은 채 이어졌다. 우스갯소리로 이집트 미술은 4000년 동안 변하지를 않은 탓에 시대 구분을 하기가 매우 하드하다고 토로하곤 한다. 사실이 아니다. 왕조 이전과 고왕국 시대부터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의 예술 양식도 다분한 변화를 겪었고 이런 요소들은 이집트학자들 눈에는 단번에 파악된다. 그러나 매우 유사한 양식이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일반인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게 함정.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면 위의 이미지를 참고하자. 필자가 고용된 노비살이 기관의 소장품 중 한 작품인 이 두상 조각은 뒷면에 이집트 성각문자, 곧 히에로글리프가 멋지게 남아있음에도 하필 파라오의 이름에 관한 단서는 모두 사라진 상황이다. 남은 문자를 열심히 읽어본들 "위대하신 아문 라/태어났다/토트 신의 땅이 어쩌고…" 정도로 인물을 특정하기는 힘들다. 일단 헤제트 백관과 데슈렛 적관이 결합한 프스켄트 이중관을 쓰고 있으니 매우 높은 확률로 파라오의 초상을 묘사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아툼이나 호루스 등 지체 높으신 신들 중에도 이중관을 쓴 모습이 종종 발견되기는 하지만) 일단은 신왕국 시대 어느쯤의 작품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을 뿐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상태다. (학술적 근거가 충분한 이견이 있다면 부디, 환영합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피라미드의 땅 이집트에서는 고대부터 나름대로 일종의 캐논(Canon) 개념에 입각해 조각상을 제작했다. 캐논이란, 조각상을 만들 때 실제 모델이 없어도 실제 인체 비례에 가깝게 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개념이다. 카메라 브랜드 아님주의 그런데 이집트 조각상들은 진짜 인간의 몸이라기엔 좀 기묘한 뻣뻣함이 있는데 그 이유는 절대측정방식의 문제에 기인한다. 이집트 조각가들은 모눈종이 (모눈 파피루스 정도 되겠지?) 위에 정면에서 본 인체 부위를 납작하게 쪼개서 배분했다. 즉, 인체는 3D인데 이집트 조각의 제작방식은 2D 방식이었던 거다. 때문에 이집트 조각에는 1)동작에 따른 근육의 수축과 이완, 2)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인체 길이, 3)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변하는 대상의 형태 등 3D의 입체감을 부각시키는 요인들을 모두 반영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좀 기이한 자세의 조각상이 완성된다. 아래 작품을 보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가면 봉헌물을 나르는 이집트 중왕국시대 여인상을 만날 수 있다. 12왕조시대의 왕실 시종장이었던 메케트레(Meketre)의 무덤에서 발굴된 다양한 조각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 여인 목조상은 정교한 조형과 기적처럼 남아있는 채색으로, 고왕국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부장 미술에 어마어마한 공을 들였던 중왕국시대의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이고 귀족이고 매장 즉시 도굴꾼들이 고대 이집트판 툼레이더를 찍어댔는데, 메케트레라는 인물의 무덤도 예외는 아니라 20세기 발굴 당시 이미 탈탈 털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멭 발굴팀이 숨겨져있던 방을 하나 찾았고 거기에는 이 여인상을 비롯해 엄청난 조각품들이 부장돼 있었다. 부유하고 지체 높은 망자가 사후세계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무덤에 부장품으로 봉헌됐을 이 여인상은 물고기가 가득한 바구니(실제로 조그만 물고기 조각이 다글다글 들어있다)를 머리에 이고 산 오리의 날개를 붙잡은 형상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조각은 망자의 재산, 특히 지역명을 기입해 부동산을 상징하는 존재(Estate Figure)로 기능하기도 했다.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544210?searchField=All&sortBy=Relevance&deptids=10&ft=goddess&offset=180&rpp=20&pos=190)
고대 이집트의 조각가들에게 실제 인체와는 조금 다른 기이함은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간적인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신봉한 신들의 형상을 생각해보라.) 이에 정면 비례는 완벽했지만 실제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가 조각됐다. 그렇다고 고대 이집트의 조각 기술이 저조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는 당대의 미학이었다. 무엇보다도 고대 이집트는 신의 아들이자 신의 현신인 파라오가 통치하는 전제군주의 국가였다. 애초에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창작 의지를 발휘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는 소리다. 게다가 피라미드와 미라를 만드는 등 현세보다도 내세의 삶을 더 중시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변화무쌍한 인간의 실제 모습보다도 불변하며 신격화된 이상적인 형상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 거다.
그림이라고 안 뻣뻣했던 게 아니다. 이집트 신왕국시대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총애한 왕비 네페르타리와 이시스 여신의 다정한 형상은 왕비의 계곡에 자리한 네페르타리 왕비의 무덤 갤러리(QV66) 내 벽화의 일부로, 위 이미지는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찰스 카일 윌킨슨의 수채 모사화이다. (진짜 부조 벽화는 당연히 이집트 왕비의 계곡에 있다.) 왼쪽의 네페르타리는 반투명한 시스 드레스를 입고 독수리와 깃털, 그리고 태양 원반이 장식된 왕관을 쓴 아름다운 모습이다. 오른쪽의 여신은 마치 하토르 여신처럼 태양을 담은 뿔관을 썼지만 바로 옆에 표기된 히에로글리프 상형문자는 그녀가 이시스 여신임을 가리킨다. 얼굴과 하체는 측면을, 안구와 상체는 정면을 기록한 이토록 뻣뻣하고 오묘한 매력이라니. 아울러 일부 학자들은 동시대의 유행을 따른 네페르타리 왕비와 복고풍 복식을 따른 이시스 여신의 패션을 비교하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후에 복식사 주제로 다시 한번 다뤄볼 수도 있을 듯.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557811)
국내에서 만나는 고대 이집트 미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대영 박물관 등 세계 유수의 기관들에서 고대 이집트 유물은 대단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파트로서, 대부분 상설전시 형태로 전 세계 관람객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문화재 약탈 문제와 예술품 반환 논란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는 하다. 이와 같은 고대 이집트 미술을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간혹 개최되었던 특별전시를 제외하면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2016년 아시아 최초로 서울 삼청동에 개관한 바라캇 갤러리가 이집트 컬렉션을 상설전시로 공개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노예가 되었다 2021년 10월 17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시 《환상게임 : 바라캇 이집트 보물전》을 통해 고대 이집트의 걸작품을 집대성하여 선보이고 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도 뉴욕 브루클린 박물관과의 협업을 통해 세계문화관의 이집트실을 마련하여 2022년 3월까지 상설전시의 형태로 이집트 유물을 공개할 예정이다. 야금야금 연장을 하는 모양새인데 언제까지 이럴지. 얼핏 듣기로는 이집트에 이어 멭 뮤지엄과의 협업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전시로 넘어간다고 해서 매우 기대가 크다. 대체 언제부터 할 건데 드디어 실현됐다!
참고문헌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13.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김호경 옮김. 예경북스, 2010.
H.W. 잰슨, A.F. 잰슨. 『서양미술사』. 최기득 옮김. 미진사, 2001.
미술사 연구는 오늘날의 수많은 학자들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재 진행형의 영역에 놓여 있다. 특정한 예술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절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미술사학 역시 부단한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시간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근접하고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갈 따름이니까. 그러니 의견의 방향이 다르다고 맹렬한 비난을 하시면 아마 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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