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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Sep 10. 2021

그리스, 이성과 조화의 3D

서양미술사의 계보 #2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기본적으로 신화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종교와 역사, 지성과 감성, 철학과 미학이 융합된 결과물로서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Theogony』나 호메로스의 저작들에 나타나는 그리스 신화는 세상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이치에 신성을 부여하고, 인격을 갖춘 신들과 신을 닮은 영웅들의 서사를 다채롭게 그려낸다. 개막장족보 그래서 재밌지 고대 그리스의 예술가들은 많은 경우 그들의 신화로부터 소재를 얻어 그 내용을 조각이나 회화로 표현했다. 이처럼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의 조형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로서 당대 문학과 미술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초래됐다.


저승의 왕 하데스의 부인 페르세포네를 묘사한 것일까? 바라캇 서울 소장.


어쨌거나 그리스의 폴리스, 곧 도시 국가들의 사정은 이집트와 같은 오리엔트의 전제군주 국가들과 사뭇 달랐다. 해안에 인접한 그리스 폴리스들은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 속에 해상 무역을 통해 발전하며 절대 군주 1인의 지배에 예속되지 않았다. 물론 주변 국가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리스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의 문화를 화려하게 꽃 피웠다. 특히 그리스 미술은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던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척도이자 가장 아름다운 형태"라는 개념을 갖추게 된다. 그 결과, 그리스의 신들은 모두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자칼 형상의 아누비스, 고양이 여신 바스테트 등 조류, 포유류, 파충류, 곤충류를 아우르는 형상을 한 신을 섬긴 것과는 정반대인 셈.


그리스, 이상적이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3D 인간

고대 그리스 미술의 키워드는 이상미, 조화미, 균형미를 추구하는 인간 중심의 미술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나타난 낭만주의적 성격을 제외하면 그리스 미술은 고전주의적 미술의 토대라고 부를 만하다. 인간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려는 그리스 미술의 경향성은 이후의 서양미술사, 특히 고전주의적 경향의 미술사조인 르네상스 미술, 신고전주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는 신전을 중심으로 한 건축과 섬세한 회화가 돋보이는 도기,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 등도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가장 주목할만한 분야는 역시 조각이었다.


그리스 도기를 아예 안 다루면 아쉬우니 한 점 보고 가자. 대단한 몸값을 자랑하는 기원전 5세기 아티카 적색상 크라테르. 바라캇 서울 소장.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겸 수학자였던 폴리클레이토스는 저서 『캐논 Canon』을 통해 인체 비례에 대해 정리했다. 하지만 그리스 조각에 도입된 캐논 개념은 이집트와는 달리 완벽한 3D에 입각한 형식이었다. 즉, 그리스 조각가들은 이집트 조각가들이 무시한 캐논의 세 가지 문제점, 1)동작에 따른 근육의 수축과 이완 2)각도에 따른 인체 길이 변화 3)관람객의 시각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등을 고려한 상대 측정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에 콘트라포스토 짝다리 개념이 더해지며 그리스 조각상은 캐논이 실제 비례로 적용돼 보다 생생한 인체 표현이 가능해졌다.


그리스 조각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칼로 무 썰듯 구분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각 시기의 구분이 중요한 전쟁의 발발 시점과 맞물린다는 점이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500년경에 걸친 1)아르카익 시대 (혹은 고졸기), 페르시아 전쟁 (영화 〈300〉 덕분에 더 유명해졌지만 이 영화가 다룬 건 3차 원정 시기임을 꼭 기억하자) 이후부터 시작된 2)고전 시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 전후부터 기원전 31년경(이미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의 사정이지만, 일단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숙적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승리하는 시기)까지의 3)헬레니즘 시대로 구분할 수 있겠다.


아르카익, 썩소의 생동감

아르카익 시대의 그리스 조각상은 이집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모습이다. 수직성과 정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르카익 시대의 조각상은 이집트 조각 못지않은 뻣뻣한 차렷 자세와 다소 억지스러운 미소로 "정말 그리스 조각이야?"라는 의문을 가질만하다. 그래서인지 연대기적 구성을 따른 그리스 미술 전시에 가면 초반부에 크게 당황하시는 분들이 빈번히 목격된다.


그래도 아르카익 시대의 조각가들은 이집트 조각보다는 실제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기술적으로는 미약했지만 인체의 각 부위에 공간을 넣고 정면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보인다. 특히 '아르카익 스마일'이라고 불리는 조각상의 미소는 현대인들의 눈에 썩소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인체 조각을 이상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이 시기를 상징하는 표현 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쿠로스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의 페플로스 코레.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조각들이 고대에는 매우 화려하게 채색이 되어있었다는 끔찍한 사실.


아르카익 시대의 대표적인 조각상인 쿠로스와 코레. 쿠로스는 남성의 누드상이고 코레는 여성의 착의상이다. 이 시기에는 여성보다 남성의 누드를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대강 이런 거겠지. "뭐? 여자가 옷을 벗고 맨살을 드러낸다고? 망측하고 아름답지 못하잖아!" 그리스에서는 남성들 간의 동성애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으니까.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덕분에 당시 그리스 여성 복식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있게 되었으니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기쁜 일이다.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253370 , https://theacropolismuseum.gr/en/statue-kore-peplos-kore)


고전기, 드디어 콘트라포스토

기원전 492년부터 448년까지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이 지나고 그리스 미술 양식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주 고전적인, 무척이나 교과서적인 형태의 조각상이 등장하는 이 시기는 18세기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그토록 찬양해마지 않았던 바로 그 고전기. 일반적인 그리스 조각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의 걸작품들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아르테미시온 청동상 (포세이돈 혹은 제우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그리스 조각의 주특기는 대리석보다도 오히려 청동 주조였다는 사실은 자주 간과된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자랑하는 아르테미시온의 청동상은 고전기의 엄격 양식(Severe style)을 충실히 따른 그리스 조각상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 혹은 제우스 신을 묘사한 작품이다. 다리를 안정적으로 벌린 포세이돈 혹은 제우스의 자세에서 콘트라포스토가 확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정된 하반신과 수직적 몸통, 포세이돈의 삼지창 혹은 제우스의 번개를 던지려는 상반신의 역동성은 정중동의 미학을 드러낸다. (https://www.namuseum.gr/en/collection/klasiki-periodos-3/)


고전기 그리스 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일명 짝다리 포즈다. 조각 기술의 발전으로 그리스 조각상들은 더 이상 긴장한 차렷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쉬어" 상태의 짝다리 자세로 볼 수도 있는 콘트라포스토 포즈는 인체의 미묘한 곡선을 드러내고 관람객의 시각적 안정감을 자아내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처럼 포즈에 생동감이 부여되자 더 이상 아르카익 스마일의 억지스러운 연출은 필요 없게 됐다. 그 대신,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그리스 조각상 하면 떠오르는 고요하고 사색적이며 엄숙하고도 우아한 표정이 나타난다.


로마 알템프스궁전 국립박물관에 있는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비너스〉를 모사한 로마 시대의 모사작. (© 2008. Photo: Sergey Sosnovskiy)


그리고 그리스 조각의 고전기에는 드디어 여성의 매혹적인 누드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에 의해 여신의 나체를 표현한 첫 조각으로 알려진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는 우아 양식(grace style)의 조각이다. 슬프게도 그리스의 원본 조각은 소실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모두 로마 시대의 모작이다. 사실 우리가 자주 만나는 그리스 조각은 원작보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모작이 더 많다. 그렇다고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게 고대 로마라고.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네레이드 제전〉 역시 고전기의 작품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이오니아식 신전을 모방한 건축 양식과 바다의 님프인 네레이드를 묘사한 섬세한 조각 양식을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다. 네레이드는 물에 젖은 얇은 드레스를 착용한 채 아름다운 몸과 부드러운 피부를 은근이 노출하고 있다. "아직 여성의 몸을 완전히 노출하기는 좀 그렇지? 그럼 살짝 비치는 옷을 입히자고. 바다요정이니까 바닷물에 젖어서 옷감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어우 막 생각만 해도 너무 좋지 않냐?" 뭐 이런 대화를 하며 만들었을까. 강박이 느껴지는, 아니 이쯤 되면 광기에 가깝다.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galleries/nereid-monument)


런던 대영박물관의 〈네레이드 제전〉과 네레이드 조각상.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헬레니즘기,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오늘날의 터키, 인도 북부 등으로 오리엔트 지역으로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년 사망하면서 그리스 조각은 또 한 번 양식적 변화를 겪게 된다. 바로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간정이 넘쳐흐르는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대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을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전파시키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간다라 지역의 미술과 같이 동양과 서양의 미술이 결합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헬레니즘 시기의 조각상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감정의 표출과 뒤틀린 신체 표현이다. 헬레니즘 미술의 주요 개념은 비애감이란 의미의 파토스(Pathos)라고 할 수 있는데, 파토스는 관람객의 시각에서 긴장감과 다양한 심리를 자아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시기에는 파토스를 통한 풍부한 감정의 표현,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은 표정, 뒤틀린 자세, 장식성이 부각된 의상과 헤어스타일 등 실험적인 도전을 하게 된다. 이에 헬레니즘 시기의 미술에는 감정 중심의 무질서하고 화려한 낭만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르네상스 후기의 매너리즘 미술, 바로크 미술, 낭만주의 미술 등과 같은 맥락의 성격으로 정리할 수 있다. 브라보 뵐플린


바티칸시국의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된 〈라오콘 군상〉. 16세기에 발굴과 복원 작업을 거친 이 작품은 헬레니즘기의 원본인지 로마 시대의 모작인지 여전히 논쟁 중이다.


헬레니즘 조각 중 파토스가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은 〈라오콘 군상〉이다. 트로이의 사제였던 라오콘이 트로이의 왕에게 그리스인들이 숨어든 목마(바로 그 트로이 목마)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자 그리스 편이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괴물 뱀을 보내 라오콘 일가를 죽이는 순간을 포착했다. 뱀에 휘감겨 비틀린 몸과 근육의 표현,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한 고통스러운 표정이 돋보이는 〈라오콘 군상〉은 비애감의 표현에 적극적이었던 헬레니즘 조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https://www.museivaticani.va/content/museivaticani/en/collezioni/musei/museo-pio-clementino/Cortile-Ottagono/laocoonte.html)


이처럼 그리스 조각은 인간을 미의 기준으로 여긴 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적 표현, 사실적 묘사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 진행됐다. 서양미술사에서 최초로 이성적이고 균형적인 비례미를 추구하고 완성한 그리스 미술은 이후 고전주의적 예술 경향의 근원으로 작용하게 된다.


국내에서 만나는 고대 그리스 미술

어릴 때부터 필수 교양서적으로 적극 권장되어온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인들의 그리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지극히 높은 편이다. 고대 그리스의 유물에 나타난 신화의 시각화는 많은 이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겠지. 2019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던 《그리스 보물전: 아가멤논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과 바라캇 서울의 특별전시 《고귀한 신화, 위대한 역사: 그리스·로마 유물 컬렉션》의 높았던 인기와 뜨거운 호응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미술을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적다. 국내에서도 2019년과 같은 특별 기획전이 빈번히 열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실정. 그러나 그리스 미술의 예술성을 맛볼 기회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6년 아시아 최초로 서울 삼청동에 개관한 바라캇 갤러리가 그리스·로마 컬렉션을 상설전시로 공개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리고 고통받는 노비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도기와 프레스코, 다양한 조각들, 그리고 다채로운 그리스 코인 컬렉션까지 만날 수 있다.


바라캇 서울 2019년 특별전 《고귀한 신화, 위대한 역사: 그리스·로마 유물 컬렉션》 전시 포스터.


참고문헌

나이즐 스피비. 『그리스미술』. 양정무 옮김. 한길아트, 2001.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13.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김호경 옮김. 예경북스, 2010.

H.W. 잰슨, A.F. 잰슨. 『서양미술사』. 최기득 옮김. 미진사, 2001.



미술사 연구는 오늘날의 수많은 학자들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재 진행형의 영역에 놓여 있다. 특정한 예술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절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미술사학 역시 부단한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시간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근접하고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갈 따름이니까. 그러니 의견의 방향이 다르다고 맹렬한 비난을 하시면 아마 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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