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 떠나간 지 사흘째 되는 새벽, 경복궁은 여전히 차디찬 침묵을 품고 있었다.
나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단종의 마지막 눈빛—굳이 감추려 해도 스며드는 그 쓸쓸함이 내 가슴을 죄어왔다.
그가 타고 떠난 가마의 흔적은 이미 사라졌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죄의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막았어야 했다.”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마치 울음의 조각 같았다.
수양이 흘린 피. 계유정난의 밤, 경복궁을 물들였던 검붉은 그림자.
그 모든 것이 내 앞에서 펼쳐졌을 때, 나는 단지 숨죽이고 바라보는 존재였다.
왕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고, 결국 그 명분은 어린 임금을 잃게 하는 족쇄가 되었다.
“왜, 왜 그토록 두려웠던가…”
왕실의 균열, 신하들의 반목, 또다시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모든 두려움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결국 나는, 권력을 움직일 자리에 서 있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단종을 내보낸 꼴이었다.
내 가슴속이 허물어지듯 쓰라렸다.
그가 떠나는 길에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한 나.
등을 돌리듯 걸어가는 어린 왕의 모습이 문득 눈앞에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
“그 아이는 단지… 조선의 임금이었을 뿐인데.”
나는 침상에서 일어나 겉옷을 입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회랑을 따라 내딛는 발걸음마다 한기와 함께 후회가 밀려왔다.
흘려진 피 위에 세워진 정국 안정… 그것이 과연 안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백성은 조용했고, 대신들은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조선의 뿌리는 여전히 피로 젖어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 피를 씻어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역사의 중심에 서 버린 사람. 수양과 한명회, 공신들의 칼날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단종의 억울함을 가슴에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
“내가… 해야 한다.”
입안에서 굳은 결심이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칼로 세운 나라를 다시 칼이 아닌 것으로 다스리려면, 무엇으로 백성의 마음을 붙잡아야 하는가.
그때였다. 궁궐의 동편, 은은한 풍경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멀리 흥천사에서 새벽 예불의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부드럽고도 단단한 울림. 마치 내 마음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나는 그 앞에 잠시 서서 생각했다.
전란과 권력 다툼 속에서도 백성들은 늘 절을 찾아 위로를 구했다.
조선의 지친 혼, 피로 얼룩진 왕실의 운명… 그 모든 것을 씻어낼 힘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불심(佛心)… 조선을 다시 숨 쉬게 만들 길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 눌렸던 불교는, 왕들의 의지 속에 움츠러들어 있었으나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고단한 삶 속에서 기댈 곳을 찾을 때, 그들은 언제나 절의 등불 아래 머물렀다.
그리고 지금, 조선 왕실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나 또한 지탱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피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정신의 기둥.
나는 천천히 흥천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 안개 속에서 들리는 목탁 소리는 점점 또렷해지며 내 마음속 어둠을 조금씩 거둬 냈다.
사찰에 다다랐을 때, 한 스님이 촛불을 다시 밝히고 있었다.
그는 내 방문의 의미를 아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마마, 이른 새벽에 어찌…”
나는 말없이 일어나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작은 불씨 하나가 어둠을 밀어내듯, 조선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빛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
내 목소리는 매우 조용했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조선에 다시 등불을 세우고 싶습니다.
백성의 마음도, 왕실의 상처도… 어디론가 기댈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스님은 나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피로 흐른 시대를 위로할 방법은 결국 자비와 깨달음뿐입니다, 마마.”
그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그래…
나는 피를 멈추려 했지만, 피를 두려워했고, 결국 그 두려움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야 한다. 칼의 시대를 끝내고, 마음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불교를 다시 세우리라. 그것이 혼란에 빠진 조선을 살릴 첫걸음이 될 것이다.”
사찰의 향이 바람에 실려 퍼져 나갔다.
그 향을 맡으며 나는 느렸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해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단종의 눈물을 지우진 못하겠지만, 그의 시대가 남긴 상처를 어루만질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새벽 공기 속에서 회랑 끝으로 흘러드는 빛은
더 이상 피가 아닌 맑은 노을의 색이었다.
“나는… 변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다짐했다.
“그리고 조선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 더는 누구도 피로 쓰러지지 않도록.”
그 순간, 내 첫걸음은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조선의 미래를 되살릴 새로운 시대, 그 시작이 바로 나에게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