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회랑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는 세월의 흐름이 담겨 있었다. 정희왕후가 수렴첨정을 통해 국정을 돌본 지 수년, 조선은 안정되었고 성종은 점차 왕실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한때 권세를 휘두르던 공신들은 하나 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정전의 기둥을 울리지 못했고, 권력의 무게는 왕실로 되돌아왔다. 정희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제 말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권력을 움켜쥐던 손은 조금씩 힘을 풀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제는 물러날 때가 다가왔다.” 권력은 끝내 붙잡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 흔히 역사는 권력투쟁으로 얼룩지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바로잡으려 했다. 세자가 왕으로서 힘을 얻고, 왕실이 중심을 되찾는 것,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의도였다.
정희는 성종을 불러 차분히 말했다. “나라의 기틀은 이제 네가 이어가야 한다. 나는 그동안 왕실을 지키기 위해 앞에 섰지만, 이제는 뒤에서 지켜보겠다.” 성종의 눈빛은 결의와 존경으로 빛났다. 그는 어머니와 같은 왕후의 뜻을 이해했다. 정희는 미소를 지었다. “너는 이제 스스로 걸어야 한다. 나는 너의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 길을 굳건히 걸어라.”
내명부의 질서 또한 그녀의 손에서 떠나야 했다. 정희는 인수대비, 곧 의경세자의 세자빈을 불러들였다.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내명부는 이제 당신이 주관하십시오. 나는 하나 둘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인수대비의 눈빛은 놀람과 결의가 교차했다. 정희는 덧붙였다. “나는 왕실을 지키기 위해 걸어왔습니다. 이제는 세자를 위해 당신이 그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 순간, 내명부의 권위는 인수대비에게로 옮겨졌다. 정희는 더 이상 앞에 서지 않았다. 그녀는 뒤에서 지켜보았다.
궁궐의 회랑을 걸을 때, 예전처럼 긴장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들의 발걸음은 차분했고, 성종의 자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평온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권력을 움켜쥐던 손은 이제 세자를 향해 내어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계산이 아니었다. 어머니로서의 마음이었다. 그녀도 한 명의 어머니였다. 세자를 지키고, 왕실을 지키며, 나라를 지켜온 어머니였다.
밤이 깊어지면 정희는 홀로 창가에 앉아 달빛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은은하게 궁궐의 지붕을 물들이고, 바람은 부드럽게 회랑을 스쳤다. 그녀는 고독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성종이 자리를 지켰고, 왕실은 안정되었다. 공신들은 하나 둘 퇴장했고, 그 자리는 성종이 채워나갔다. 그녀는 이제 물러날 수 있었다. 마음은 고요했고, 눈빛은 따뜻했다.
정희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나는 이제 어머니로서의 자리를 지킨다. 권력은 성종에게, 내명부는 인수대비에게. 나는 뒤에서 지켜보겠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평온이 담겨 있었다. 궁궐의 공기는 달라졌다. 긴장은 사라지고, 안정이 자리했다. 정희는 더 이상 앞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는 여전히 궁궐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존재였다.
조선의 정국은 서서히 변해갔다. 공신이 주도하던 권력은 왕실로 이양되었고, 성종은 중심에 섰다. 인수대비는 내명부를 주관하며 왕실의 질서를 이어갔다. 정희는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고독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그녀도 한 명의 어머니였다.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며, 세자를 지키고, 왕실을 지키며, 나라를 지켜온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