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그리고 아버지
나에게 아빠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참 낯선 단어였다.
십여 년 전 나도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기에 이제는 그다지 거리감이 없는 단어가 되었는데 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전혀 친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 자체가 많지 않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적어 보려고 메모장을 열었는데 문득 그 제목이 아빠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고 쓴 것을 발견하고는 호칭에 대한 기억을 먼저 떠올리게 되면서 이렇게 글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대체로 네 살쯤에서 일곱 살 때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년에 오십이 되는 나에게 그때는 너무 어릴 때인지라 그 기억이라는 것이 단편으로만 남아 있고 맥락이 연결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어느 기억이 앞이고, 어느 기억이 뒤인지도 확실치 않다.
더 늦기 전에 그 기억의 단편만이라도 글로 남겨두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조급한 마음마저 생긴다.
우선 어린 내가 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서서 어딘가를 다녔던 기억이 있다.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부모님이 시장 좌판에서 배추, 무 같은 채소 장사를 하시던 장면과 그 시장에서 나는 혼자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있고,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함께 놀았던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도 몇몇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 자전거는 여러 가지 짐을 실을 수 있도록 뒷자리를 개조한 운송용이었는데 짐을 높이 쌓아서 싣고 다닐 수 있도록 뒷자리 바로 앞에 디귿자 굵은 철근을 지지대로 꽂아두는 구조가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자전거의 대략적인 구조까지 기억나는 것으로 봐서 여러 차례 그 자전거를 타지 않았겠나 싶다.
나는 그 뒷자리에 올라서서 그 굵은 철근 지지대를 양손은 잡고 서 있고 아버지는 나를 뒷자리에 올라 세운 상태로 자전거를 몰았다. 뒷자리에 앉아 타는 것보다 서서 타는 것이 훨씬 더 신났을 테니 아마 아버지가 어린 아들 재미있으라고 그리 해주신 것 같다.
하지만 그 장면만 떠오를 뿐 나는 그 상황을 재미있어했는지 무서워했는지, 아버지는 아들을 태우고 달리는 자전거에서 즐거워하셨는지, 별 감흥이 없어하셨는지 떠오르지는 않는다.
시장과 관련된 또 하나의 기억은 추운 겨울이었는데 시장 아저씨들이 큰 드럼통에 나무로 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철망을 올려 홍합을 잔뜩 삶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가서는 홍합을 얻어다 먹여준 장면이다.
우리 가족이 마산 양덕에 살 때의 기억도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동네 다른 분과 언쟁을 하며 크게 싸웠고 어머니가 그걸 말리셨는데 화가 많이 난 아버지가 어머니를 방에서 심하게 밀치는 바람에 방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는 장면이다. 사실 이 장면은 내가 살아오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여자에게 함부로 하는 못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또 다른 짤막한 기억은 아버지와 내가 어딘지 모를 도로가를 걷고 있는 장면인데, 어떤 트럭 운전수가 트럭을 몰고 가다가 운전석 창문을 내려 근처를 걸어가고 있던 일군의 어린 학생들 무리에게 쭈쭈바를 한 움큼 던져 주었다. 그걸 본 아버지가 도로 하나를 가로질러 급히 뛰어가서 쭈쭈바 하나를 주워 와서는 어린 나에게 건네주었다. 당시 아버지는 약간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거의 직전인 것 같다) 기억도 있다.
아버지는 반여동 집 안방에 누워 있고 그 아버지를 앉아서 내려다보는 장면인데 어머니가 “OO인데 알아보겠능교?” 하고 물어보셨고 아버지는 “그래 OO이가?” 하며 힘없는 목소리지만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던 장면이 기억난다. 당시 이미 병이 많이 깊어져 눈이 잘 안 보이는 상태이셨던 것 같다.
앞서 부모님이 시장에서 장사하던 기억을 얘기했는데 그 시점 나에게 자전거를 하나 사 주셨던 기억도 떠오른다. 뒷바퀴 양옆으로 두 개의 보조바퀴가 달린 어린이 자전거였는데 그걸 타고 시장통을 누볐었다. 점점 자전거가 익숙해져서 쌩쌩 달리던 나를 보시고는 보조바퀴를 떼주셨는데 그 보조바퀴를 떼고도 안 넘어지고 잘 달리는 나를 대견스러운 눈으로 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창녕 소야 오촌 당숙집에서 무슨 집안 행사를 하는데 (아마 제사 거나 잔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술을 엄청 많이 드신 아버지가 누군가 받쳐 준 세숫대야 같은데 토를 하시던 장면도 짧게나마 기억난다.
그 외에는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가 보여주신 옛날 사진첩에 아버지 사진이 꽤 있었지만 그 사진 속의 장면들은 내 기억에는 없는 장면이다.
문득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여기까지이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와의 만 6년이 넘는 시간에 해당하는 무수한 장면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빠라고 불러본 기억은 없지만 분명 아빠라고도 많이 불렀을 것이다.
당시의 아버지의 시선이나 표정, 내가 아버지를 대하는 감정이나 느낌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딸 셋 다음에 얻은 귀중한 장남을 아마 예쁘게 봐주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해 주셨을 것이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 가는 내가 몇십 년 전에 돌아가신, 지금은 기억도 몇 개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 글을 쓰다가 당황스럽게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래도 이 글이라도 남겨두게 되어 마치 묵은 숙제를 해낸 것 같이 후련하기도 하다.
아버지는 나와 같은 용띠인데 세 바퀴 빠르고, 공교롭게도 나도 세 바퀴 차이나는 용띠 아들을 두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하나뿐인 내 아들이다.
괜스레 미래의 내 아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