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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리를 찾아서 Apr 13. 2023

차상마포도 아닌 졸의 옮김

북한에서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친척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2000년 후반에 들어와서야 전화기가 대중화 되면서 통화는 그럭저럭 했었지만 직접 만나기에는 이동의 제한이 있다. 


그렇기에 방학이 되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친척집에 가서 사촌들과도 어우러 지내기도 한다. 


2002년 여름방학을 맞아 나도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고모 집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고모부가 보위부(국정원과 비슷하려나)에 재직중이었기 때문에 식구가 먹고 사는데 지장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고 나는 더이상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삼촌어머니, 2명의 사촌 동생들과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그집에는 아버지와 나까지 포함하여 8명의 식구가 살고 있었고 삼촌과 삼촌어머니가 경제활동을 하여 온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내가 더이상 그 집에 살 이유가 없어졌다. 


당시 나이 12살이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고모 집으로 옮겨져 1살 동생인 사촌과 같은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2년 쯤 살았을까 다시 이모 집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이후에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모 집에는 이모부와 3살 많은 누나, 한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다들 나를 친 가족처럼 챙겨주고 신경 써 주었다. 나의 아픔을 알고 있는 듯 했다. 


14살밖에 안된 아이가 어찌보면 일찍히 양 부모를 여의고 장기쪽마냥 이곳저곳 옮겨다니면서 생활 하였기에 특히 이모부는 애처로운 마음이 더 컸을 것 같다. 

나의 삼촌들이나 고모, 큰 삼촌어머니가 들으면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모네 집에 오면서 무엇인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가정에 성이 다른 한 아이가 들어와 서서히 가족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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