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리를 찾아서 May 22. 2023

"너 같은 XX는 아무것도 못해"

북한에서는 고등학교 4학년(남한의 고1)부터 일 년에 한 번씩 군사훈련을 받는다. 

국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인의 가정과 주변환경들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흔히 얘기하는 토대를 살피는 것이다. 

부모들은 잘 있는지 혹시 친척들 중 반사회주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없는지 등등 살핀다. 


어느 날 수업을 듣고 있던 중 교장선생님이 찾아와 나를 불러냈다. 어둑 컴컴한 복도를 지나 교장실 앞에 서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이 벌렁벌렁 거린다. 

한숨을 길게 서너 번 쉬면서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다. 


방안에는 카키색 마의를 입고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하지만 결국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앉으라는 얘기도 없이 문옆에 그대로 세워둔 채 사냥이라도 하듯 질문 화살들을 쏟아붓는다. 


그 : "엄마는 어디 있니?"

나 : "모르겠습니다."

그 : "엄마가 살아 있는?"

나 : "모르겠습니다."

그 : "살아 있으면 만날 생각 있니?"

나 : "살아 있으면 당연히 만나야지요. 나의 어머니인데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지만 거의 취조하듯이 강한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나를 몰아세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미래를 위해 엄마는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 열심히 공부하고, 나라도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면 나라는 나를 써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첫 통화 시 "어머니처럼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겠다"는 말까지 내뱉은 걸 생각해 보면 당시 국가를 향한 충성심이 엄청났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이런 마음이 바뀌게 된 계기는 졸업 학년쯤부터였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갈 기회조차 없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입대의 기회조차 없었다. 

결국 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는 은률이라는 지역의 광산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대학교는 못 가더라도 군입대라도 하게 해달라고 군사동원부(병무청)에 애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담임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들이 편지를 써 교육청에 보냈지만 결국 돌아오는 대답은 제목대로 "너 같은 새끼는 아무것도 못해"라는 거였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다는 느낌을 그때는 알 수 있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려 노력했던 날들...

다수의 전교 일등 경험들..

전교학생회장과 그 시절 학교를 '영예 붉은기 학교'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

평양 견학의 TO를 받으려고 교육청 선생님들과 교류하면서 배운 경험들과 그 모든 과정들을 보상해 주 듯 수상한 '김일성 청년영예상'까지 수상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다 필요 없는 것이었다. 


과연 나는 북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등학교 졸업 후 배정받은 광산에서 탄부의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보여주려 노력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결국 유배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나만의 길을 개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 길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길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넌 나에게 뭘 주었니?

작가의 이전글 니 애비 보러 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