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리를 찾아서 Sep 12. 2023

중국의 천사

부디 오래 건강하시길...

나는 2010년 6월 말 장마철에 북한을 탈출하였다.

탈북을 하게 된 계기는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을 했다.


주머니에 이백원짜리 한장을 가지고 4시 쯤 두만강변을 서성거린다.

그러다 좋은 장소를 발견하고 주변 가게에서 빵 한개와 담배 한 개비를 사서 넓은 옥수수 밭으로 들어간다.


옥수수들 사이로 두만강이 보이고 그 건너에는 중국이다.

8시쯤 미리 사놓은 빵 하나로 허기를 채우고 또 하염없이 깊은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몇시간 쯤 지났을지도 모를 무렵 주변엔 인기척 하나 없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건 100미터 앞에 있는 두만강 뿐이다. 미리 준비한 비닐 주머니에 겉옷을 벗어 싸맸다. 팬티만 입은 골반엔 면도칼 하나를 차고 호흡 크게 두어번 하고 두만강을 향해 냅다 달린다.


일초라도 머뭇 거릴새 없이 뛰어들어 2분 가량 죽기살기로 수영하여 드디어 중국땅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에서 한 시간 가량 숨어 동태를 살피다 가장 허름한 집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며 "계십니까?"


집에서 허리를 반쯤 수구린 할머니가 나오셔 문을 열었다.

"저...혹시"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할지 알고 있듯이 할머니는 빨리 들어오라고 집안으로 손목을 잡아 끌었다.


"조선에서 왔소?"

"예. 할머니 조선에서 왔습니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아궁이 옆에 서서 대답했다.

"고생했소. 빨리 씻고 올라오시오"

부엌과 방사이가 개방된 집이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아궁이 옆에서 쭈구리고 앉아 홀딱 벗은 상태로 몸을 대충 헹구고 어르신이 주신 옷으로 갈아 입었다.


할머니는 내가 씻는 사이 밥과 반찬들을 꺼내주었다. 기름이 흘러넘치는 가지 볶음, 돼지고기 김치볶음, 흰쌀밥과 시래기 국...북한에서도 이정도는 먹고 살았다. 하지만 북한에서 먹던 밥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한국에 계신 엄마와는 다음날 아침에 연락하기로 하고 윗방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께서 티비를 봐도 되고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으니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했다. 온통 중국어로 되어 있는 방송을 이해 할리는 만무하고 아이스크림만 원없이 먹었다.

그날 밤 얼마나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던지 새벽에 화장실을 두 세번 들락거렸다.


나는 그 집에서 나흘동안 지내게 되었다. 물론 엄마와 통화를 하여 돈을 보내주었지만 그 분들은 그 이상으로 잘해 주었다.


북한에서도 중국 사람들에 대해 흔히들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돈만 밝힌다든지, 똥떼놈들이라는 이미지, 북한 사람이 보이면 공안에 신고하여 돈을 받는다든지 등등

하지만 이분들은 나를 돈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해 주었고 당시 38살이던 노총각 형님은 연길까지 직접 데려다 주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은인이 있다. 나에게는 이분들이 은인이자 천사이다.

아직 살아계실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오래토록 건강하게 계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글을 쓴다.

작가의 이전글 모내기 전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