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09.
책과 글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야기.
겨울이 오면 더욱, 이야기가 듣고 싶다.
다정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 덕분이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여고생의 오후 국어시간, 그날도 식사 후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해 눈이 감겼다가, 책에 연필심을 주욱 긋는 느낌에 혼자 화들짝 놀라 눈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낮고 맑은 목소리를 가진 국어 선생님께서 출제된 적이 있는 소설들을 간간히 이야기로 풀어주셨는데 그날 읽어주신 소설은 이청준의 ‘눈길’이었다.
선생님은 주인공의 아내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불속에 답답하게 누워만 있는 남편을 두고,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장면이었다. 속이 아파서, 마음이 너무 쓰려서 꺼내지 못한 둘 사이의 이야기를 아내가 기어이 끄집어냈다. 눈길을 걷던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어떻게도 이길 수 없던 졸음은 달아나고, 어디선가 눈길의 차갑고 아린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쭈글쭈글한 노모가 이야기를 꺼내. 목이 메었나, 울분을 토해내서 시원했나, 끅끅 차 올랐을까 어떤 목소리였을까 생각해 봐. 새하얀 눈길을 걸었다고, 그날의 이야기를 결국 꺼내고 만 거지. 아무도 걸어간 적도 없고 사방은 그냥 허허벌판이랑 산만 보여. 눈이 너무 많고 고와서 뽀득뽀득 소리도 안 났을지도 몰라. 그래도 고요한 와중에 발소리가 서로 들리긴 했겠지. 훅 쭈그러든 노모가 아들의 뒤를 힘없이 걸어. 집도 절도 없는 엄마가 내 자식 위한다고 그 추운 날, 아들이 멀리 떠나는 길 배웅을 한다고. 뭔 상황인지 아들은 알지도 못해. 엄마는 아들 보내고 다시 돌아와. 이제 돌아가면 집도 없어. 아니 애초에 집이 없었는데 아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쉬게 하려고 잠깐 집이 있는 척했지. 사방이 적막한데 아들이 걸어갔던 발자국을 따라서 엄마가 걸어온단 말이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눈물을 쏟아. 내 아들아, 너는 고생하지 말고 편히 살아라, 부디 눈물 쏟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아들은 이불에 웅크려있어. 눈물이 차 오르는데 자기가 모질게 대해 온 엄마를 볼 자신이 없지.
얼마나 서러우셨어요, 아내는 늙은 엄마의 이야기에 목이 메어. 좀 일어나 봐요, 남편을 자꾸 불러대.
작가가 소설로 썼지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선생님은 이야기를 마쳤다.
눈물이 목까지 차 올라서 나는 그만 책에 뚝, 고인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모성애가 뭔지, 그 눈길이 얼마나 저리고 아팠을지, 집 잃은 서러움과 아들의 차가운 눈길을 애써 피하며 버틴 늙은 엄마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열여덟의 여고생이 자세히 알 리 없었다.
아마도 그저 이야기의 힘을 알았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세상 속으로 나는 들어가 있었다. 닿지도 않는 이의 고통, 흔한 듯 흔하지 않은 관계 속에 존재하는 애정과 증오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났다. 삶의 무거움과 처절함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사랑을 느꼈다.
그 느낌은 일종의 희열과도 같아서 나는 여전히 거의 매일 책을 읽고, 가슴을 뜨겁게 해 줄 이야기를 찾는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찾고 느끼고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기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