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에 배운 것들

2021. 12. 21.

by midsunset


큰 아이의 방학이 시작됐다.

아이가 배우고 싶은 것들 하나 둘 학원을 찾아 등록을 하다 보니 동선이 애매해졌다. 운전을 거의 하루 종일 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엄마가 되었다.


큰 아이를 데려다주고 작은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다시 큰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고, 오고 가는 시간에 간식을 차에서 먹여야 하는 분주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는 수많은 학원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하루가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그 때문에 차에서 대기하는 시간과 근처 카페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엄마들도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좀 같이 놀아주면 될 것을, 집에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얼마나 많은데, 엄마표 공부를 하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것이 서로가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큰 아이는 선생님을 잘 따르는 편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을 좋아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친구들을 사귀는 일도 꺼려하지 않고 재밌어한다. 그러다 보니 뭘 배우고 싶다, 어떤 학원에 다녀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꺼낸다. 경제적인 부분이 크게 문제 되지 않는 한 우리 부부는 아이의 의견에 귀 기울여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해 주자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짧다. 나의 하루도 더불어 정신없이 흘러간다. 아이의 에너지는 곧 마흔이 되는 나의 에너지와는 양과 질이 달라서, 하루 스케줄을 다 소화한 후에도 여간해서는 방전이 되질 않는다. 쾡한 얼굴로 늦은 오후를 맞이하는 나와는 달리, 생기가 넘치고 하고 싶은 일이 여전히 많은 큰 아이를 마주할 때면 젊음의 힘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루에 다 해냈던가,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놀라워서 웃음이 날 정도다.


초등학교 때 유난히 바빴던 어느 여름 방학을 떠올려본다. 집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 곳인지도 모르고, 한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교실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방학 전 교실에서 참여 여부를 묻는 선생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삼십여 분 후에 정류장에 도착하면 또 이십 분 정도를 걸어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책을 한 권 읽고 조원들과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제출하고 나만의 책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루 종일 했다. 엄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먹고, 중간중간 친구들과 모여 앉아 간식을 꺼내 먹고, 읽을 책을 골라 가방에 담아 버스에 오르면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버스에서 보며 집으로 향했다. 그 나이엔 잘 이해도 할 수 없는 슬픈 사랑이야기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운이 남아 잠을 설친 가난하고 처절한 시대적 배경이 담긴 책들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독후감을 쓰는 숙제를 했다. 다섯 살 위 언니에게 오늘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을 했는지, 저녁을 먹으며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책에 파묻혀 잠들었다가 이른 아침에는 근처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 배드민턴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마다 코피가 쏟아졌다. 쉽게 멎지 않는 코피 때문에 콧구멍에 뭉툭한 휴지를 꼽은 채 도서관을 찾아가는 날이 많았다.


그 해 여름에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잔상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이게 무슨 이야기야, 하고 제대로 못 읽던 책을 어떻게든 읽어서 감상을 써 내려가던 다른 학교에서 온 친구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밌게 해석해 낸 독후감을 발표하던 시간, 정류장에서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만난 친구 덕분에 발견한 지름길, 아주 어색하고 낯선 공간과 관계가 친근하고 익숙해져서 독서교실이 끝나고 헤어질 때는 펑펑 울면서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던 기억. 방학이 끝나고 우리 집에 도착한 다른 학교 친구의 편지, 하얀 얼굴에 리본핀이 잘 어울리던 그 아이의 편지의 끝에 쓰인 문장을 여전히 기억한다.


이번 여름, 독서교실에 다녀서 정말 특별하고 재밌었어. 너처럼 좋은 친구가 생겨서 정말 기뻐.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어느 해의 어느 계절, 어떤 경험이 내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지 하나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코피가 날만큼 바쁘게 지내던 어린 날들을 떠올리며 내 앞에 앉아 눈곱도 안 떼고 책에 빠진 큰 아이를 본다. 한 시간 후면 오늘 하루 일정이 또 바쁘게 시작된다. 바삐 지내는 방학 동안 너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를 볼 수 있으면, 오래 기억에 남을 소중한 추억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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