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6.
며칠 동안 이래저래 바깥 음식으로 끼니를 채웠더니 어딘가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해서 건강한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장을 보기에 앞서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을 꺼내어 잘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꺼내보았다.
단호박과 계란, 오이, 아보카도, 엊그제 동네 빵집에서 주문해 가져온 슈톨렌, 아주 조금 남은 우유, 당근을 채 썰어 만든 당근 라페, 방울토마토와 옥수수 통조림 등이 조리대에 쌓였다.
겉면을 씻은 단호박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자르기 좋게 살짝 익힌 후 찜기에 쪄내고 껍질을 벗겨낸 속을 믹서에 곱게 갈았다. 그동안 냄비에 물 조금과 버터 한 조각, 양파 반쪽을 넣어 뭉근하게 끓여 식혀놓았다. 큰 냄비에 곱게 간 단호박과 함께 물 조금, 우유 조금, 치킨 스톡 조금을 넣고 나무 주걱으로 저으며 중불에 끓이다가 약한 불로 줄여두고 식혀놓은 양파와 버터 끓인 물을 믹서로 갈았다. 그것을 냄비에 부은 후 생크림을 한 국자 넣어서 다시 중불로 끓이다가 한 스푼 맛을 보았다. 약간은 심심한 맛이 느껴져서 소금 조금, 후춧가루 조금, 설탕을 조금 넣고 휘휘 저었다. 끓어오르다가 가라앉다가를 반복하다 보면 약간의 점성이 생기면서 노란 단호박과 여러 가지 양념들이 어우러져 꽤 수프다운 맛과 형태가 되었다.
인터넷 검색 창에 오이와 당근의 궁합을 검색했다. 같이 먹으면 좋은 영양소가 흡수되지 못한 다기에 두 야채를 번갈아보다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식감인 오이를 택했다. 삶은 계란 껍질을 벗겨내고, 이케아에서 몇 해 전에 사 둔 슬라이스 툴에 끼워 예쁜 모양으로 잘라냈다. 잘 익은 아보카도는 반으로 갈라 씨앗에 칼을 살짝 박히게 해서 비틀며 꺼내고, 칼집을 내어 스푼으로 파서 접시에 담았다. 방울토마토를 씻어담으니 빨강, 초록, 하얗고 노란색이 고루 담겨 예쁘게 어우러졌다. 마르지 않게 랩을 살짝 씌워뒀다.
다음은 빵 차례, 종이로 돌돌 말아진 슈톨렌을 꺼내어 길쭉한 빵칼로 가운데부터 잘랐다. 각종 견과류와 과일 종류가 들어간, 겉은 단단하고 속은 촉촉한 투박한 빵이 얇게 슬라이스 될 때마다 겉면에 붙어있던 달콤한 슈가파우더 덩어리가 쏟아졌다. 단면이 보이게 길쭉한 모양으로 접시에 담고 식탁을 닦으며 식구들을 불렀다. 커트러리를 꺼내어 아이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식탁에 준비한 접시들을 하나씩 놓은 후 따뜻한 보리차를 담고 향긋한 커피를 내렸다.
후보에 올랐으나 채택되지 못한 음식들을 차곡차곡 쌓아 냉장고에 넣고 주방을 대충 정리한 후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남편이 단호박 수프를 한 입 먹고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스푼을 뜨고, 아이들은 삶은 계란과 아보카도, 빵과 슈가파우더 조각을 찍어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수프를 한 입 떴다. 몸이 따뜻해졌다. 접시가 하나씩 비워질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뿌듯한지, 설거지는 일단 나중에 해결할 일이니까 다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과 주방을 둘러보니, 전쟁통이 따로 없다. 그래도 건강하게 한 끼 잘 먹었으니 됐다. 얼른 헤치우고 푹신한 곳에 앉아 진한 커피를 마시면 다시 편안해질 것임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