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 액땜

2022. 1. 1.

by midsunset


새해 아침, 주방에서 첫 번째 한 일은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서 각각 풀어주는 일, 약한 불에 달군 프라이팬에 흰자를 올려두고, 어젯밤 물에 담가 둔 떡을 한 번 씻어 체에 건져놓았다. 고명으로 올릴 다진 소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는 동안 냄비에 시금치 데칠 물을 올리고 시금치를 씻었다.


계란 흰자 부침을 도마 위에 올려두고 노른자를 팬에 올려두었다. 그동안 시금치를 데쳐야지, 혼잣말을 해 댔다. 끓는 물에 시금치를 줄기부터 살살 넣어 다 들어간 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한 소절 부르고 시금치를 꺼내어 찬물에 담갔다. 아이 손 잡아주듯 아귀에 살짝 힘을 주어 짜두고, 아이들 먹기 길지 않게 칼로 한 번 썰어두었다.


하양, 노랑, 그래, 당근도 올려야지, 또 중얼거리며 당근을 꺼내 채를 썰었다. 약한 불에 올려 둔 노른자 부침이 잘 익어 도마 위에 내리고 키친타월로 팬을 한 번 닦았다. 채 썬 당근을 살살 볶아냈다. 열기가 살짝 남은 팬에 물기를 짜낸 다진 소고기를 올려 수분이 날아갈 만큼 볶았다. 팬 바닥에 고기에서 나온 물방울이 줄어드는 동안 사골국물을 냄비에 듬뿍 담아 끓이기 시작했다. 소고기에 다진 마늘과 간장 조금을 넣어 맛있는 색과 향을 입혔다.


준비해 둔 시금치에 다진 마늘, 소금, 간장을 넣어 조물거리다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한 번 더 무침 마무리를 했다. 김치를 썰어 접시에 담고, 쪽파 세 가닥을 꺼내 쫑쫑 썰어 그릇에 넉넉히 준비했다. 파 머리 부분은 미리 사골국물에 한 줌 넣었다. 끓는 국물에 떡과 만두를 넣고, 그동안 계란 지단을 가늘게 잘랐다. 올해는 작년보다 솜씨가 나아졌네 싶어 괜히 흐뭇해졌다. 노란 지단이 반듯하고 샛노랗게 예쁘게 됐다.


지단으로 올릴 재료들이 준비되고, 물 한 잔을 들이키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요리 삼매경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었는데, 회사일로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고 있는 남편 곁에 아들 둘이 철썩 달라붙어 수많은 질문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일하랴, 대답하랴, 고생을 하고 있길래 “배고프지? 우리 얼른 밥 먹자.” 하고 괜히 분위기를 환기시켜봤다.


“어우, 배고파, 밥 주세요.”

“떡국 빨리 주세요, 배고파요.”


남편과 아이들의 목소리에 마음이 급해지고 손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작은 아이가 수저를 놓고 남편이 컵에 물을 따랐다. 책에 빠진 큰 아이는 꼼짝할 줄 모르다가 슬금슬금 식탁으로 다가왔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춘 국물 맛을 한 입 맛본 후, 그릇에 떡국을 덜어담고, 준비해 둔 계란 지단과 소고기, 당근과 쪽파를 고명으로 얹었다. 깨소금을 살살 얹어내니 제법 그럴싸한 요리로 보였다.


네 식구 기분 좋고 배부르게 잘 먹고 새해 덕담을 나눴다. 여기까지 아주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설거지를 시작하면서 음악 세 곡 재생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를 해야겠다, 다짐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물 쓰레기를 미리 건져놓을 생각으로 고무장갑을 낀 손을 크게 펴서 야채 껍질 등 개수대 한 쪽에 쌓아놓은 음식물을 한 움큼 집었다.


이 느낌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지, 아주 제대로 칼에 새끼손가락 옆면이 닿아서 칼날을 쓸며 지나갔다. 급히 정리하느라 칼을 개수대에 넣어둔 채로 칼이 놓인 곳을 의식하지 못하고 음식물을 집은 것이 화근이었다. 아픈 느낌도 없이 그저 제대로 베인 것이라 생생하게 느껴져 뒷골이 서늘했다. 장갑을 얼른 빼보니 다행히도 크게 다치진 않았다. 피가 났지만 상처가 깊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남편이 와서 밴드를 붙여주며, 새해 첫 날 액땜한 것인가 하니 비로소 살짝 놀란 가슴이 진정됐다. 아, 오늘이 새해였지, 정말 액땜을 한 셈이로구나 싶었다.


미신을 반 정도 믿는 편인데, 오늘도 반 믿어보려고 한다. 올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 많이, 감당할만한 안 좋은 일 조금 생길 것이라 그저 살짝 다친 것이 다행인 어느 하루일 뿐이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누구에게 맞닥뜨릴지 모를 안 좋은 운이 다가오기 전에 나의 상처로 액땜을 했다고.


이상, 떡국 잘 끓여서 잘 먹은 어느 새해 아침의 일기 끝.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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