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케이크

2022. 1. 26.

by midsunset


내가 어린 시절 살던 아파트에는 동백나무가 꽤 많았다. 이름 모를 꽃도 풀도 많이 심어져 있어서 소꿉놀이를 할 때, 진수성찬을 차리기 딱 좋았다. 주로 붓꽃의 까만 씨앗을 모래 위에 올려 콩밥을 만들고, 주황색 빛 꽈리 열매껍질은 김치가 되었다. 나뭇잎을 돌로 찧어 나물을 만들고 가끔 비가 온 다음날 패인 바닥에 고인 물은 오목하게 마른 낙엽에 담아 국이나 찌개로 이름 붙여졌다. 흙탕물은 청국장이나 된장국, 솔잎을 조금 뿌리면 미역국, 맑은 물에 밝은 색 돌을 조금 넣으면 소고기 뭇국, 나름의 모양새를 갖춘 밥상이 매번 차려지곤 했다.


어느 날 오후에, 우리는 늘 아지트처럼 이용하던 화단 한쪽에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도 할머니였다. 나는 자주 할머니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에도 약간 애어른 같았나 보다. 밥상의 한가운데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상이 차려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 역할을 맡은 우리의 리더 친구가 그날따라 유난히 반찬을 많이 만드는 것이었다.


“얘야, 아직도 음식을 더 만들고 있니?”


내가 할머니 목소리를 내며 묻자, 그 친구가 대답했다.


“어머니, 오늘 어머니 생신이라서 맛있는 것을 많이 준비했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더니, 손녀 역할을 맡은 친구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할머니, 저 잠깐만 슈퍼에 다녀올게요. 피곤하시죠? 잠깐 잠자고 있으면 돌아올게요.”


손녀 친구가 말하자, 엄마 역할을 맡은 친구가 나보고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라고 했다.


“갑자기 자라고?”


뜬금없는 이야기 전개에 내가 당황하자, 엄마 친구와 손녀 친구는 나의 눈꺼풀을 굳이 손으로 내려 닫아주었다. 실눈을 뜨는 요령도 아직 안 붙은 나이라, 나는 눈을 감고 할머니 목소리를 내며 다음 스토리 전개를 기다렸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 일어나 보세요, 이제 눈을 뜨세요!”


엄마 친구의 말에 눈을 떠보니, 하얀 모래가 가득 쌓인 모래성 옆에 동백꽃이 빙 둘러져 있었고 가운데는 나뭇가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케이크를 준비했어요. 할머니 생신 축하해요.”


손녀 친구의 말에 나는 박수를 치며 나뭇가지 초를 후후 불었다. 모래성 옆을 두른 빨간 동백꽃이 어찌나 예쁘던지 치울 수도 없이 아까워서 그 자리에 며칠을 놔두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유명 빵집들에 케이크들이 가지각색으로 예쁘게 나오지만, 그 무렵 동네 빵집의 케이크에는 짤주머니로 빨간 크림을 곱게 짜서 올린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엄마 역할을 한 친구는 동백꽃 케이크를 만들었던 것 같다.


동백꽃 케이크가 우리의 소꿉놀이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었는지, 한참 동안 생일상 차리기 놀이를 이어갔다. 돌잔치, 환갑잔치, 결혼식까지 별별 이벤트에 동백꽃 케이크가 등장했다. 그 무렵 우리 아파트 화단의 동백꽃은 아마 우리가 다 꺾어서 케이크를 장식하느라 썼을지도 모른다.


제주에 살면서 동백꽃을 원 없이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가을을 맞이하자, 그 시절의 동백꽃 케이크가 떠올랐다. 색종이 오려서 날려 놓은 듯 뿌려진 동백꽃 길에서 뛰어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수백 장 사진을 찍어대다가 나의 어린 추억도 꺼내보았다.

그 추억이 귀엽고,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이 귀엽다. 그런 것이 추억이구나, 별 것이 추억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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