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 세끼 바캉스
출근과 등교 전쟁에서 살아남은 워킹맘의 아침밥은 간소하기 짝이 없다. 회사 책상에서 허겁지겁 먹는 다방 커피 한 잔과 삶은 달걀 한 알, 사과 반쪽이 전부다. 그마저도 전쟁에 진 날은 입맛도 기운도 다 달아나 겨우 다방 커피 한 잔이 끝. 남편의 사정이 나와 다르지 않고, 동료 워킹맘들의 사정이 나보다 나을 리 없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면 든든하고 여유로운 아침밥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아침에는 역시 밥보다 잠이 고프고 내 밥보다는 아이 밥이 중한 것을.
오전 근무를 정신없이 하다보면 배 속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난다. “꼬르르륵, 배고파. 꾸르르륵 밥 줘!” 그 포효가 어찌나 크고 우렁찬지 건너 자리 동료에게까지 들리기 일쑤다. 회의 또는 미팅 중이이라면 여지없이 얼굴이 빨개지고 민망한 웃음이 나올 정도다. 붐비고 시끄러운 회사 식당이 싫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점심식사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상태로 해치운다. 초콜릿 몇 알과 디카페인 다방 커피 한 잔으로 정신없는 오후를 보내면 드디어 퇴근이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저녁으로 뭘 먹을지 냉장고 속 음식들을 떠올리며 행복한 고민을 시작한다. 얼큰한 김치찌개로 차고 빈속을 풀어볼까, 달콤짭쪼름한 불고기를 구워서 상추에 한 쌈 싸볼까, 온갖 나물에 고추장 넣고 슥슥 비벼볼까. 상상만으로도 침이 절로 고인다. 그러나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렸을 두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앞에 두고 백반 정식은 역시 무리다. 그러니 빨리 먹을 수 있는 빵이나 과자, 과일을 집어들고 싱크대나 식탁 앞에 서서 후다닥 해치운다.
하루 한끼 제대로 차려 먹기도 힘든 내게 필요한 것은 삼시 세끼 바캉스 티켓이다. 쫓기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건너뛰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제대로 차려서, 하루 세 번, 혼.자.서. 먹을 수 있는 그런 휴가. 그림책 <식당 바캉스>에서 콧수염 씨가 떠나는 그런 휴가.
빠듯한 일상에 지친 주인공은 버스며 욕조며 침대며 이불이며 산과 들까지 모든 것이 음식으로 만들어진 곳에서 맛있는 휴가를 즐긴다. 이 황당무계한 상상의 세계를 어딘가에 실재하는 듯한 세계처럼 그려 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가방을 꾸리고픈 충동이 인다.
어느 숲 한가운데 아무도 없는 작은 숙소에서 실컷 자고 느지막히 일어나서 아침을 차려 먹어야지. 비록 눈에는 눈곱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얼굴에는 개기름이 흐르고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뻗쳐 있을지언정, 아침은 영화나 그림책에 나올 법한 우아한 한 상을 차리려고 한다. 하얀 린넨을 탁탁 털어서 식탁에 정갈하게 깔고는 그 위에 차가운 음료부터 놓는다. 예쁜 항아리에 담은 우유와 갓 짜낸 오렌지 주스, 그리고 시원해서 유리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생수 한 잔. 담백하고 거친 빵 몇 조각과 칼집을 많이 내서 구운 육즙 팡 터지는 소시지,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만든 포슬하고도 탱글한 달걀 오믈렛, 무쇠 솥에서 적당히 아삭하게 쪄낸 갖가지 채소를 커다랗고 하얀 접시에 한 번에 담을 거다. 밀크티는 달지 않은 것으로, 커피는 반드시 달달한 맥심모카골드로 마셔야지. 혼자서 이런 아침을 먹는 것만으로도 이 바캉스 만족도의 절반은 채운 거다.
아침을 먹고 나면 작은 가방에 따뜻한 녹차를 담은 텀블러와 황남빵 몇 알을 챙겨들고 숲 산책에 나설 거다. 오래오래 천천히 걷다가 시냇가에 발도 담그고 풀밭에 벌러덩 눕기도 하고 커다란 나무 둥치를 껴안아 볼 거다. 점심거리를 구할 수 있는 숲이면 더더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 꽃도 꺾고 나물도 뜯고 버섯도 따야지. 아, 가져간 차와 빵은 시냇물에 발 담글 때 먹고, 그 가방에 숲의 선물을 가득 담아오면 되겠다.
점심으로는 숲에서 뜯어온 나물과 버섯을 넣고 솥밥을 할 거다. 갖가지 나물들은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들기름에 달달 볶고 다시마 물을 넣어서 쌀과 함께 안치면 끝. 솥뚜껑을 열 때 피어나는 달큰하고 향긋한 냄새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밥이 슴슴하니 고추장찌개를 함께 먹으면 좋겠다. 기름에 살짝 볶은 고추장에 나박나박 썬 채소와 돼지고기를 넣고 달달 볶다가 물 넣고 푸욱 끓인, 걸쭉하고 맵칼한 고추장찌개. 첫 그릇은 밥 따로 찌개 따로 떠먹겠지만, 두 번째는 슥슥 비벼 먹을 것이고 세 번째는 바삭하게 볶아서 먹어치울 예정이다. 막걸리도 한 잔 걸치면 오랜 산책의 피로가 절로 풀리겠지.
낮잠 한숨 달게 자고 일어나서는 반신욕을 하면 좋겠다. 편백나무 노천탕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쉬운 대로 플라스틱 욕조라도 나의 짧은 두다리를 뻗고 누울 정도의 크기면 된다. 거품이 잔뜩 떠다니는 욕조에서 영화 주인공처럼 레드 와인 한 잔을 들고 음악도 듣다가 책도 읽다가 영화도 보면, 이곳이 바로 낙원이로세.
삼시 세끼 바캉스의 대미를 장식할 만찬은 분위기를 잔뜩 낼 예정이다. 촛불도 켜고 산책길에서 데려온 꽃도 꽂고 레드와인도 한 잔 따라놓고, waltz for debby 같은 잔잔한 재즈 음악도 틀고 와인잔 들고 혼자 춤도 출 거다. 이 저녁을 위해 낮부터 뭉근히 끓여 둔 라구 소스와 페투치네 면을 넣어 파스타를 만든다. 솥밥 만들고 남은 나물에 유자 소스 조르륵 따라서 파스타에 곁들이면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좋은 하루가 마무리 되겠지.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낮에 물멍, 숲멍 했으니 밤엔 불멍 해야지. 모닥불 피워 놓고 불멍 하다보면 분명 출출해질 거다. 불판에 가리비와 새우 올려 익힌 뒤 소주로 마무리하면, 꿈같은 삼시 세끼 바캉스는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아침, 점심, 저녁과 야식 설거지가 남았지만 이 바캉스의 기본 옵션은 다행히 NO 설거지와 NO 청소다.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고 휴가의 묘미는 맛집 탐방이지만, 내가 나를 온전히 잘 대접하는 일이야말로 휴가가 아니면 해 보기 힘든 일이다.
쓰기만 해도 설레는 이 바캉스, 써 놓고 보니 못 갈 것도 없는 이 바캉스. 회사일은 잠시 미루고 집안일은 아이와 남편에게 맡기고 당장 떠나야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나의 보통 날 삼시 세끼는 여전히 간소하고 정신없고 온전치 않겠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삼시 세끼 바캉스가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