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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tral Sep 28. 2024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14

헌 유리병에 담긴 진심

종종 내용물보다 포장 용기에 이끌려 물건을 산다. 개중에는 차나 사탕이 담긴 이국적인 모양의 틴케이스나 빵이나 쿠키가 담긴 키치한 그림의 종이 상자도 있지만, 압도적으로 끌리는 것은 역시 유리병이다. 빈티지한 빨간 체크무늬 뚜껑의 잼 병부터 다정한 손글씨가 새겨진 주스병, 납작하고 둥근 스프레드 병,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 와인병, 주둥이에 클립이 달린 들기름 병까지.

내용물을 다 먹어도 용기는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은다. 모았다 버리기를 반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크기도 생김도 제각기인 헌 유리병들을 요긴하게 쓴다. 병조림 음식을 만들고부터다. 유리병이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갖가지 조림과 절임 음식들.


비트를 넣어 맛보다 색으로 먹는 분홍빛 무 피클,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찔 듯한 당근 라페, 밥에도 빵에도, 심지어 떡에도 어울리는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이런 새콤 달콤 상콤한 절임 음식은 유리병에 담아야 제맛이다.

아이와 남편이 아플 때마다 찾는 복숭아 조림,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고기 절일 때도 유용한 파인애플 조림, 환절기 잔기침에 특효인 배숙, 빵순이의 영원한 친구인 딸기잼과 이름만 들어도 파리에 온 듯한 블루베리 콩포트. 유리병 속에 담긴 계절 과일 조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속에 달콤함이 차오른다.

레몬이나 오렌지, 유자와 청귤, 모과와 사과를 얇게 저며 만든 과일청은 혀끝에서 느끼는 맛도 맛이지만, 켜켜이 쌓인 모양이 주는 묘묘한 조형미를 눈으로 보는 맛도 일품이다.

굴과 문어, 관자를 올리브 오일에 푹 담가 만드는 해산물 절임은 금세 상할 걱정을 덜었으니 든든한 마음으로 몇 주를 날 수 있다.

늦봄의 매실청, 한여름의 상그리아, 초겨울의 맛간장은 유리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들이다.

폼도 티도 안 나는 밑반찬 노동을 꺼리고 싫어하지만 병조림은 시간이 날 때면 아니, 없는 시간도 쪼개어 만든다. 병조림을 만드는 이유를 묻는다면 수백 가지도 댈 수 있다.

병조림은 가성비 최고의 음식이다. 비싼 재료와 힘든 조리법, 긴 조리 시간이 필요 없음에도 색달라지고 깊어지는 맛과 향이란!

병조림은 팔방미인 같은 음식이다. 단독으로도 충분히 맛나고, 웬만한 음식과도 잘 어울리고, 다른 요리의 훌륭한 밑재료가 되기도 하니, 어느 하나 버릴 데 없는 만능 쓰임새란!

병조림은 가는 계절을 붙잡아 두는 음식이다. 딱 그때만 나는 제철 식재료를 병 속에 붙잡아 두고 야금야금 꺼내 먹으며 그 계절을 음미하는 기분이란!

병조림은 쓸모의 시간을 늘리는 음식이다. 먹을까 말까 망설여지는 농익은 재료가 유리병 속에서 다른 양념들과 어우러져 새로 태어나는 모습이란!

병조림은 변하는 것을 변치 않게 하는 음식이다. 정성껏 다듬고 썰고 조리고 절인 음식을 열탕 소독해 깨끗한 유리병에 차곡차곡 담는 마음이란!

병조림은 온몸에 빛을 더하는 음식이다. 유리병에 비친 색색의 빛을 머금은 음식을 입에 넣을 때 환해지는 느낌이란!  


이러니 기꺼이 시간을 쪼개어 병조림을 만들지 않을 수 없고, 만든 병조림을 지인들에게 건네지 않을 수 없다. 병조림 선물은 곁에 붙잡아 두고픈 이, 나의 쓸모를 기꺼이 주고픈 이, 변치 않는 마음을 바치고픈 이, 더 많은 시간을 나누고픈 이, 더 환하게 빛났으면 하는 이들에게 하는 일종의 고백이다.

‘깨끗하게 닦은 마음에 담은 나의 시간과 쓸모를 받아 주세요.’


이런 고백은 새로 산 유리병보다는 모아 둔 유리병에 담아야 제격이다. 선물을 위해 몇 번은 비싸고 예쁜 유리 용기를 사기도 했다. 그런데 어쩐지 새로 산 병에 담은 조림은 내용물마저도 남이 만든 것을 산 것 마냥 허전하고 아쉽기 짝이 없었다. 쓰고 또 쓴 헌 것일지언정 나의 손때와 시간과 이야기가 있는 유리병에 담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고백인 듯 느껴졌다.


그림책 <레미 할머니의 서랍>에도 아름다운 고백을 위해 헌 초콜릿 상자를 쓰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레미 할머니는 쓸모가 다한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서랍 속에 소중히 모아 둔다. 물건들은 어두운 서랍 속에서 새롭게 거듭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빈 병은 할머니가 장터에 내다 팔 음식들의 용기가 되고, 리본은 아기 고양이의 넥타이가 되고, 털실은 누군가의 모자가 된다. 마지막까지 서랍 밖으로 나가지 못해 우울한 작은 갈색 상자는 마침내 할머니의 이웃 레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어떤 물건보다 아름다운 것, 레미 할머니를 향한 레오 할아버지의 고백이 담긴 반지를 품는다. 상대의 소중한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멋지다고 말해 주고 그 소중함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할아버지였기에 할머니는 남은 생을 함께 보내겠다고 결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병조림 선물을 받은 지인들 역시 어김없이 그 진가를 알아봐 준다. ‘생활의 일부를 선물해 줘서 고맙다’든지 ‘음식도 그릇도 사람도 새것보다 오래된 것이 좋지.’라든지 ‘다 먹고 난 병에 나도 무언가를 채워서 다른 이에게 선물할게.’라든지의 답 덕분에, 나는 오늘도 유리병을 모으고 그 병을 채울 병조림 음식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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