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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tral Jun 22. 2024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9

밥 먹자! 솥밥 먹자!     

유산균과 프로폴리스,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알약에 홍삼 엑기스까지. 날마다 종류도 효과도 다양한 영양제를 먹고 있지만, 날마다 속이 허하다.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밤이 되면 속만 허한 게 아니다. 온몸이 허하다. 머리는 아프고 어깨는 뻐근하고 허리는 쑤시고 다리는 무겁고... 온몸이 녹아내린다는 표현을 체감한다. 지난 주말에 충전한 기를 다 소진해 버린 탓이다. 갈비도 구워 보고 치킨도 시켜 보고 산낙지도 먹어 보지만, 역시 이럴 땐 밥 따수운 밥 갓 지은 밥이 필요하다. 위장만이 아니라 심장도 채워 주는 그런 밥 말이다.  빵순이네 면러버네 떠들고 다녀도 역시 밥이다.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하지 않았나.


강렬하고 역동적인 제목자가 인상적인 그림책 <밥 먹자!>에도 그런 밥이 등장한다. 손수 키운 작물들을 팔러 나온 농부들로 북적이는 여름날의 시골 장터. 타는 듯 뜨거운 여름 햇볕에 농작물들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그걸 지켜보는 농부들의 애간장도 녹아내린다. 그때 한 할머니가 외친다. “밥 먹자!”

커다란 솥에 지은 밥 위로 알록달록 채소와 고추장, 참기름이 쏟아진다. 쓱쓱 비벼 한 그릇씩 먹는 농부들의 동작은 힘차고 신난다. 그들은 타들어가던 속도 녹아내리던 애간장도 밥심으로 이겨 낸다.


밥 먹자! 라는 말은 마법의 주문 같다. 그 말만 들어도 힘이 난다. 그래서 나도 마법의 주문을 외친다.

“밥 먹자!”

그러려면 밥을 지어야 할 터. 늘 먹는 밥이지만 주말에는 특별한 밥을 짓는다. 어떤 밥을 하겠냐고, 뜸들이는 중이라고, 다 되었으니 저어 주라고 살뜰히 챙겨 주는 전기밥솥도 편리하지만, 무겁고 물 맞추기도 불 맞추기도 번거로운 무쇠솥에 밥을 짓는다. 쌀을 안쳐 밥만 짓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재료를 올린 솥밥을.

솥밥은 극진한 마음으로 대접하려고 짓는 밥이라 했다. 뜨거운 밥을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어서 왕과 왕비의 밥을 지을 때 작은 솥에 밥을 지었다고 하고, 일반 가정집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주로 솥밥을 지어냈단다. 이만하면 지친 나를 극진한 마음으로 보살피기에 맞춤하지 않은가.


하얀 쌀밥 위에 색도 맛도 향도 제각기인 재료가 올라간 솥밥을 먹으면, 절절 끓는 구들장에 깔린 요와 이불에 쏙 들어간 기분이다. 일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속상해서 허기진 몸과 마음이 뜨끈하게 채워진다.

솥밥은 밥이 되는 과정조차 위로다. 불린 쌀의 노긋노긋한 감촉과 참기름에 쌀을 볶을 때 나는 자그락자그락 소리, 보글보글 밥물 끓는 소리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모양, 솔솔 퍼지는 밥 냄새를 느끼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촉촉해진다. 그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오장육부는 밥 달라고 나대지만, 본격적인 솥밥 짓기는 이제부터다.

재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한소끔 뜸을 들이기 직전에 각종 고명을 올려야 식물성 재료는 흐무러지지 않고, 동물성 재료는 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밥 위에 올리는 재료는 그때그때 다르다. 냉장고에 있는 무엇이든 쌀 위에 올려 지으면 그것대로 푸진 솥밥이 된다. 국 끓이고 남은 시래기, 물러진 토마토, 냉동실 속 잔멸치, 소비 기한 임박한 캔 옥수수와 크림치즈까지도. 그럼에도 제철 재료를 올린 솥밥이 제일 맛있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지.


봄날의 솥밥은 향으로 먹는다. 톡 쏘는 달래나 쌉쌀한 냉이, 향긋한 두릅, 싱그러운 미나리, 풋내나는 곰취까지. 봄 솥밥은 숲속 한가운데서 하는 심호흡이 부럽지 않다. 살짝 구운 명란을 곁들이면 양념장도 다른 반찬도 필요 없다. 게다가 명란의 톡톡 터지는 식감이 나물의 아삭거리는 식감과 어우러져 먹는 재미도 있다.

여름날의 솥밥에는 역시 힘을 주는 재료들을 올린다. 쫄깃쫄깃한 전복이나 낙지, 쫀득한 소고기나 닭고기를 넣은 솥밥을 먹고 나면 없던 기운도 펄펄 난다. 여기에 송송 썬 쪽파나 부추를 한가득 넣으면 해산물의 비릿한 맛이나 육고기의 느끼한 맛이 잡혀 몇 그릇이고 먹을 수 있다.

가을날의 솥밥은 눈으로 먹는다. 버섯과 무와 호박과 고구마 같은 채소, 대하, 게, 광어 같은 해산물이 어우러진 솥은 푸짐하고 화려해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겨울 솥밥에는 바다를 통째로 옮겨 온다. 굴을 비롯해서 도미, 가리비, 홍합과 꼬막, 문어를 올린 겨울 솥밥은 내가 가장 즐기는 것이다.


몇년 전 한 연예인이 해먹은 금태 솥밥으로 SNS며 유튜브의 요리 채널들이 들석였다. 죽은 입맛도 살아 돌아오게 한다는 둥, 소식좌도 식욕이 폭발하는 맛이라는 둥 각종 후기가 눈에 들어왔다. 구순이 넘은 연세에 특별히 편찮은 곳 없이 건강하시던 시아버지가 통 드시지도 못하고 누워만 계시기에 제주에 금태를 주문했다. 금태와 전복, 버섯과 쪽파를 하루 온종일 손질해 밥을 지었다. 달래를 넣은 알싸한 양념장도 준비했다. 만들면서 먹어 본 금태는 과연 고소하고 담백하고 비리지 않아서, 이만하면 몇 술이라도 뜨시겠지 싶었다.

갓 지은 밥의 온기가 식을세라 무쇠솥째로 허겁지겁 달려가 차린 금태 솥밥을 아버님이 잘 드셨으면 이야기는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겠지만, 인생이 어디 뜻한 대로 되나. 시아버지는 밥은 두 숟가락, 전복 구이는 반 개도 못 드시고 수저를 놓으셨다. 시어머니는 ‘아버지 비린 거 잘 안 드신다.’라고, 남편은 ‘아버지가 생선보다는 고기를 더 좋아하시지.’라며 내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편찮으시니 못 드시는 건 당연하고, 걱정되고 민망한 마음에 배려 없는 말이 불쑥 나온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일찍 가신 울 아부지와 멀리 계신 울 엄마께는 이런 밥 한 번 못 해드렸는데, 하루 종일 한 번 앉지도 못하고 지은 밥인데, 저런 말들은 그냥 속으로만 하지. 속상하고 서러워서 화도 나고 눈물도 나는 걸 꾹꾹 누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새로이 금태 솥밥을 지었다. 다른 날보다 아이에게 더 크게 외쳤다. “밥 먹자!” 금태를 으깬 밥에 청양 고추 썰어 넣은 매콤한 양념장을 넣고 쓱쓱 비벼 입에 한 가득 넣었다. 솥밥을 먹을 때면 늘 그렇듯, 우리는 어느새 한 솥을 싹싹 비웠다. 뜨거운 밥을 후후 불어 먹다 보니 서늘한 마음이 따뜻해진 것 같았다. 쓱쓱 비비다 보니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잠잠해진 것 같았다. 빈 솥을 보니 텅 빈 마음이 가득 찬 것 같았다.

살아가면서 속상한 일, 힘든 일, 내 맘 같지 않은 일은 무수히 많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내게는 마법의 주문이 있으니까. “밥 먹자! 솥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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