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퐁당 빠져들어요
일본 요코하마의 오이와 씨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초대장이 도착한다. 로마나의 트란스발에서 11월 4일 오후 6시 3분에 열리는 다과회의 초대장. 오이와 씨는 중산모를 쓰고 양복을 입고 전기자전거를 타고 그곳으로 간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1년 만의 만남에 설레는 오이와씨의 마음이 엿보인다. 트란스발로 향하는 건 오이와씨 뿐만이 아니다. 인도와 프랑스에서, 독일과 벨기에에서, 터키와 중국에서, 호주에서도 초대장을 들고, 개성 넘치는 복장에 자기만의 탈것에 몸을 싣고 속속 모여든다. 드디어 11월 4일 6시 3분! 이들은 트란스발의 바위산에서 솟아오르는 코코아를 마시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헤어진다.
일본 만화가 사사키 마키의 그림책 <이상한 다과회>의 줄거리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도, 금박 가공을 한 표지도 정말 특별한 초대장을 받아든 기분이 드는 책이다. 보통 때라면 ‘코코아 한 잔 마시려고 산 넘고 물 건너 그 길을 가다니!’ 했겠지만, 전염병을 3년 째 겪던 시점에는 제발 그런 일이 있어라, 바라고 또 원했다. 많은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아무 걱정 없이 차를 마시는 일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 수 있을는지 요원한 날들이었다.
역병의 시절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다. 해거름 무렵 가로등이 켜지면 우리는 작은 책방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책방 주인부터 편집자, 마케터, 번역자, 작가, 시인, 독서교실 선생님까지,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취향도 다 다른 우리가 모인 이유는 그림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바쁜 일과를 마친 뒤라 얼굴은 어둡고 어깨는 쳐지고 허리는 구부정하고 다리는 무겁지만 눈빛만은 반짝였던 나의 그림책 친구들.
우리는 달마다 특정 주제나 작가를 정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책을 읽고 쓴 북 리뷰가 이 모임의 유일한 준비물이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는 준비물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음식! 약속한 것도 아닌데 겹치는 메뉴 하나 없이 준비해 온 음식들을 보고 있노라면, 리뷰를 쓸 때만큼 고민했을 마음들이 떠올라 기분이 촉촉해지곤 했다.
은박지에 도르르 말린 김밥 몇 줄과 치즈와 누룽지가 두툼하게 깔린 치킨, 시장 떡집의 몰캉한 떡, 힙한 제과점의 케익과 쿠키, 철마다 달라지는 색색의 과일, 향긋한 차와 커피, 어린이 멤버를 위한 다정한 사탕과 젤리까지 각자가 가져온 음식을 기다란 테이블 위에 펼쳐놓으면 어느 그림책 장면보다 근사한 다과회 자리가 펼쳐졌다.
우리는 음식과 함께 수십 권의 그림책들을 맛있게 먹었다.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에서 한바탕 뱃놀이를 마치고 티 파티를 연 아저씨와 아이들처럼 왁자지껄하게 존 버닝햄의 그림책들을 즐겼고,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에서 식탁과 냉장고의 음식을 모조리 먹어 버린 호랑이처럼 게걸스럽게 주디스 커의 그림책들을 탐했다. 일 년 열두 달 먹어도 물리지 않는 <닭고기 수프> 같은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들을 호로록 들이켰고, 먹을 때마다 다른 것이 보이는 <알사탕> 같은 백희나의 그림책들을 천천히 녹여먹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 젖을 찾듯 사노 요코의 그림책들을 빨아들였고, <라신 아저씨와 괴물>에 나오는 괴물처럼 토미 웅거러의 그림책들을 따먹었다. 죽음과 폭력을 다룬 쓰디쓴 그림책들을 삼키고, 성과 사랑에 관한 달콤한 그림책들을 핥았다.
그림책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었고, 음식 덕분에 더 오래, 더 깊이 그림책을 즐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서로의 고민과 삶을 나누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추억은 아쉬운 과거형이 되어 버렸지만 마음은 현재 진행형이니 다시 희망찬 미래형을 그려 볼까. 다시 한 자리에 다시 모이게 되는 날에 우리는 어떤 그림책을 보면 좋을까, 어떤 음식을 나누게 될까?
손꼽아 기다린 모임을 이야기하는 그림책, 하나를 향하는 설레는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책으로 <이상한 다과회>만큼 맞춤한 책이 있을까? 고백의 편지를 쓰듯 그간의 그리운 마음을 담은 리뷰를 정성껏 써야지. 책 속 바위산에서 흘러내리는 코코아처럼 진득한 초콜릿이 흘러내리는 케익 ‘퐁당 오 쇼콜라’도 준비해 가야지. 긴 하루 뒤 지쳐서 ‘녹아내리는’ 몸과 마음을 초콜릿에 ‘퐁당’ 빠뜨려 다독여 줘야지. 오븐에 한 판 가득 구워서 모자라지 않게 해야지. 프랑스 저술가 니코 타키앙은 ‘사랑이란, 퐁당 오 쇼콜라 하나를 나눠 먹는 것, 그리고 용케 그 사람 몫을 먹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지만, 나에게 ‘사랑이란 1인 1퐁당 오 쇼콜라를 먹는 것’이다. 맛있는 건 하나씩 먹고 두 배로 행복해야지.
그럼 연습 삼아 미리 만들어 볼까. 퐁당 오 쇼콜라는 베이킹 중에서도 간단한 편에 속한다. 준비할 재료도 몇 안 되고, 오븐이 없어도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베이킹이든 모임이든 시작이 반이다!)
1. 볼에 다크 초콜릿과 버터를 중탕해서 둘이 겉돌지 않도록 살살 저으며 녹인다. (뱅글뱅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조금씩 섞여 들어가는 모습은 누군가와 친해지는 과정과 닮았다. 그림책 친구들과도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서로에게 녹아들었지.)
2. 또 다른 볼에는 달걀과 설탕, 소금, 바닐라 익스트랙트를 넣고 설탕이 녹을 때까지 중탕한다. 이걸 중탕 하는 까닭은 볼 두 개에 담긴 재료가 잘 섞이게 하기 위해서다. (사람이든 재료든 서로의 온도가 비슷해야 하는 법이다. 저마다 달라도 그림책을 사랑하는 온도가 비슷한 이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잘 섞였다.)
3. 박력분을 체에 곱게 내려 나머지 재료와 섞고 잘 저어 주면, 다른 재료가 들어갔나 싶을 정도로 반죽의 색은 이제 온통 초코색이다. (결국 그림책으로 하나 된 우리!)
4. 버터를 골고루 펴 바른 용기에 반죽을 넣는다. 반죽 속 공기도 빼고 용기에 평평하게 자리잡도록 용기를 바닥에 탕탕 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안팎의 자극은 관계와 감정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정리해 준다.)
5. 이제 190도로 예열한 오븐에 15분 정도 굽는다. 퐁당 오 쇼콜라는 굽는 시간이 정말로 중요하다. 오래 구우면 평범한 초코 케이크가 되어 버린다. 오븐 앞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창 너머로 어느 정도 익은 듯 보일 때 꺼내야만, 겉은 촉촉하고 속은 초콜릿이 주르륵 흘러내려 퐁당 빠지고픈 디저트가 완성된다. (베이킹도 모임도 타이밍!)
6. 너무 식히면 그 속의 초콜릿도 함께 굳어 버리는데, 그때는 그릇째 중탕을 하면 굳은 초콜릿이 다시 녹아 최상의 상태로 맛볼 수 있다. (굳어진 빵과 멈춰 버린 모임을 살리는 건 온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세지 않게 뭉근하게.)
7. 베리류를 곁들여 아메리카노와 먹으면 금상첨화다. (가끔 오는 깍두기 손님들은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책과 음식이 준비되었으니 이제 초대장을 띄울 차례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 말고 마음이 왈랑왈랑해지는 손 편지를 써야지.
‘친애하는 여러분께 우리 다시 퐁당 빠져 들어요. 그림책에, 음식에, 인생에!’
*코로나가 끝나고 그림책 읽기 모임은 동화 읽기 모임으로 이어졌으나, 나는 아직 퐁당 오 쇼콜라를 구워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