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stral Apr 29. 2024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3

아빠에게 건배를


몇 년 전, 일본 여행길에 서점에 들렀다가 놀라운 그림책을 한 권 발견했다. <かんぱいよっぱらい 건배, 술고래> 술을 주제로 한 그림책이었다. 온갖 음식 그림책이 나오는 일본이지만, 술이라니! 술과 그림책이라니! 감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주제이고 세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인데,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건배’를 매개로 위트 있게 풀어냈다. 완두콩씨와 닭튀김씨가 맥주로 건배! 올리브와 치즈, 햄 자매가 와인으로 건배! 오징어 할아버지가 정종으로 건배! 오므라이스와 스파게티가 멜론 소다로 건배! 당장이라도 술 한잔 들고 건배를 외치고 싶은 그림책이다.


술 하면 또 내가 빠질 수 있나. 술자리에서 곧잘 마시는 나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내 이름이 술 주에 신선 선 인 거 몰랐어?” 한창때 내 주량은 맥주는 무제한, 소주는 네 병, 와인은 두 병 정도였다. 일주일에 여덟 번을 마시러 다녔고, 숙취는 어느 나라 말이냐고 어깨를 으쓱했으며, 술 아깝게 오바이트는 왜 하냐고 뻐겼고, 술로는 안 진다며 술자리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남자 동기나 후배들과 내기를 하던 무모한 시절이었다. 심지어 마시면 마실수록 까무잡잡한 얼굴이 뽀얘지니, 어찌 맨 정신으로 더 좋았다 하리오.


이렇게 술 잘 마시고 술자리 좋아하는 건 아빠를 닮았다. 우리 아부지로 말할 것 같으면, 결혼 초 외갓집식구들과의 대작에서 맥주 몇 궤짝을 홀로 해치우며 압승을 거둔 바 있는 전설의 주당이었다. 역시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 없고, 열매 안 맺는 나무 없다는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 그래서인지 술과 관련된 기억은 온통 아빠다.


내 인생 첫 술은 대학 입학을 앞두고 동네 호프집에서 아빠와 마신 맥주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술 취하지 않는다고, 술이 너를 마시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 갖가지 주도를 비롯해 술 마실 때 물도 많이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서 취하지 않는다는 실질적인 조언도 잊지 않으셨다. 봄에는 매실주를 여름에는 맥주를 가을에는 막걸리를 겨울에는 정종을 마시면 좋고, 맥주는 맥주잔에 소주는 소주잔에 매실주는 매실주잔에 마셔야 제맛이고, 치맥이 유행하기도 전에 이미 맥주는 통닭과 소주는 알탕과 막걸리는 전과 함께라는 안주 페어링까지 알려 주셨다. 온갖 꿀팁이 난무한 밤이었다. 그날로부터 25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까지 매 술자리마다 그 밤을 곱씹는다.  


내 인생 가장 아쉬운 술은 아빠와 마시지 못한 정종이다. 대학교 1학년 어느 가을날에 근처에 볼일 보러 오신 아빠가 저녁 먹자고 전화를 하셨다.(때는 97년. 삐삐를 치셨나.) 사랑에 눈이 먼 나는 그 선배를 보겠다고 아빠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그때만 해도 앞으로 그럴 날이 아주 많은 줄 알았으니까. 그날 아빠와 정종을 마셨더라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놓쳐 버린 술과 추억이 아쉽고 또 아쉽다.  


내 인생 가장 맛있는 술은 아빠의 첫제사상에 올린 와인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스페인으로 떠나온 나는 첫제사를 홀로 바다 건너 이국에서 차리게 되었다. 제사상에 술을 빠뜨릴 수 없으니 좋아하시는 맥주를 올릴까, 위스키를 올릴까 고민하다가 와인이 흔한 나라이니 와인을 올렸다. 일 년에 열댓 번씩 제사와 차례를 지내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등등 제사상 차리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아는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답게 레드 와인 아닌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홀로 절을 하고 엉엉 울면서 음복을 하는데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내 인생 가장 쓴 술은 아빠를 생각하며 마신 소주다. 결혼하고 첫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외할머니 묘에 성묘를 가게 되었는데, 남편을 포함해 시가 식구 누구도 아부지 산소에는 언제 가냐고 물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혼이란 건 이런 거구나, 울 아부지 산소에 먼저 갈 수 없는 거구나, 서럽고 속상해서 깡소주를 두 병이나 들이켰다. 그날 알았다. 소주와 결혼은 쓴 맛이라는 것을.  


예전만큼은 마시지도 않고 마실 수도 없지만, 맛있는 비율로 소폭과 양폭을 말 줄도 알고, 매년 여름이면 상그리아를 담고, 불 싸지른 정종으로 혼술도 할 줄 알고, 매실주는 꼭 매실주잔에 먹어야 하는, 아빠처럼 술 좀 즐기는 중년의 딸은 이제 몇 년 후면 돌아가신 아빠와 같은 나이가 된다. 그날이 오면 예쁜 잔에 직접 담근 술 두 잔을 따라놓고 외쳐야지.

동갑 아부지, 건배!


작가의 이전글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