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 전략들이 시장 곳곳에 스며 있는 것을 자주 마주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 위에 세워진 듯한 전문적인 태도는 겉보기에 세련되어 보일 수 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지속 가능한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본업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토록 표면적인 전략은,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걸까요?
물론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정의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어떤 자격을 입증하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부족함을 반추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글 역시 특정한 누군가를 겨냥한 비판이 아니라, 보편화되는 사회적 경향성 속에서 느끼는 고민을 정직하게 기록해보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저는 지금 7월 이후에 진행될 작은 피아노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제 콩쿠르를 놓치고 졸업도 미루고 있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곡을 놓지 않고 연습 중입니다. 피아노 외에도 그림과 글을 위한 습작이나 작은 리허설 무대를 직접 기획하며, 모든 과정을 혼자 꾸려 나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창작자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요한 걸음이라고 믿습니다. 무명이기에 기획자에게 최소한의 비용만을 제안받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그것 또한 하나의 현실적인 선택지로 받아들입니다.
그저 왜 이 일을 계속하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문득 마주하게 되는 그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때론 어떤 이름이나 보상보다,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그 단순하고 진심 어린 동기가 가장 오래 남는 힘이 되기도 하니까요.
잘하든 못하든, 작업의 성패는 결국 스스로 감당하고 성장해나갈 몫입니다. 외부에 작업을 드러낸 이상 비판은 감수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평가로 창작의 방향과 가능성이 제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대가 리허설이든 아니든, 작업의 성격과 목표에 맞는 방식으로 서로 존중하고 동의하는 태도는 예술 생태계의 건강함을 지켜주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또한 예술가의 기여도나 작업의 가치를 단순히 수익성이나 금액 규모로만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공정한 보상과 기회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은 단지 상품으로 거래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창작은 언제나 작가의 감정, 기억, 시간, 존재의 궤적을 동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작업의 정당한 가치를 판단하는 변별력과, 작업 자체의 맥락을 존중하는 태도는 예술적 정체성에 대한 존엄이자, 창작이라는 행위 안에 스며든 내면의 서사와 실존적 맥락을 자본의 표면적 질서로 환원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택이라 믿습니다.
부디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묵묵히 이어가는 이들의 마음이 ‘검증되지 않았음’이라는 이유로 쉽게 외면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보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창작을 이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