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그림들은 북유럽의 고요한 정서와 영국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영국 글로스터 시에는 베아트릭스 포터의 작품 《글로스터의 재봉사(The Tailor of Gloucester)》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작은 전시 공간, The House of the Tailor of Gloucester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실제로 포터가 거주했던 집은 아니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영감을 준 실제 장소를 바탕으로 꾸며진, 문학적 상상과 역사적 흔적이 어우러진 공간입니다. 저는 이 곳을 방문했었어요.
무민을 진짜 좋아하게 된 계기는 영국을 여행하던 시절, 핀란드 출신의 한 친구를 만나면서였습니다.
무민이란 캐릭터를 알고는 있었지만,핀란드가 그렇게 소근소근하고 철학적인 작품들을 사랑하는 나라일 줄은 몰랐어요.
토베 얀손이라는 작가의 문학적 세계관 안에는 핀란드인의 사색적인 감성이 녹아있었습니다.
60대였지만 소녀처럼 상상력이 풍부하고 인텔리한 핀란드인 친구는, 제게 제인오스틴, 셰익스피어 등의 영문학을 비롯해 새들의 이름까지 알려줬어요.
핀란드의 문화가 동북아와 핀란드 사이에 느껴지는 어떤 묘한 친밀감. 그녀는 핀란드와 일본이 감정의 결 속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고 했고,자신도 일본 만화를 좋아한다고 웃으며 말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무민, 알바 알토, 핀란드식 자연주의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두 나라는 자연과의 관계, 침묵과 여백의 미학, 정돈된 공간,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는 예술세계 등에서 공통점이 많아요.
그 대화를 통해 나는 무민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들판, 동글동글 뽀얀 얼굴, 통통한 실루엣, 여백, 절제된 대사...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피터래빗은 제게 늘 익숙한 친구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크게 인연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유선티비를 설치하지 않으셔서 대부분의 만화는 비디오로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접한 건
《왕자와 거지》, 《피터와 늑대》처럼 고전 동화를 바탕으로 한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이었지요.
미키마우스나 도널드 덕 같은 익숙한 캐릭터들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그보다 조금 더 크고 나서 문구점에서 마주친 정장 차림의 갈 토끼에게 더 마음이 갔어요.
초등학생 시절부터 저는 피터래빗 문구를 애용했습니다. 그 색연필로 그린 듯한 원화느낌의 까슬한 질감, 풀과 꽃들이 가득한 배경이 취향과 잘 맞았어요.
결국 영국에 갔을 때, 글로스터에 있는 베아트릭스 포터의 작품 전시 공간에 방문했습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일본인 학생들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여행 중이라 교복은 입지 않았지만, 말끔히 정돈된 패션과 단정한 가방, 조용하고 예의 바른 태도에서 그들이 무언가를 사랑하는 방식이 느껴졌습니다.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오랜만에 만난 아시아의 얼굴들이 반가웠어요.
베아트릭스 포터의 작업일지를 지켜보며 그때 처음 ‘나도 이런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림과 글, 자연과 동물, 섬세한 색감들. 하지만 그 당시엔 진짜 작업을 이어갈 줄은 몰랐어요.
포터가 1897년, 글로스터에 머무르며 실제로 들렀던 양복점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해당 이야기에 등장하는 '재봉사'가 있었던 거리의 바로 근처이며, 그때의 기록과 스케치들이 포터의 원작 배경으로 반영되었어요.
작지만 깊이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유명 박물관과는 달리, 이곳은 조용히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조심스럽게 머무는 장소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