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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은 까페에 딱이야! (파리에 그림을 걸다)

by 사온




파리 13구에는 비영리기관에서 운영하는 소박한 까페가 있다. 나는 그 까페를 약 3년간 드나들며 커피를 마셨다. 단돈 1유로 (한화 1600원)로 즐길 수 있는 까페는 비영리기관으로,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함께 정보를 나누고 때로는 공연, 바자회, 영화 감상 등을 모여서 하는 곳이다. 난 이런 따뜻한 시골 정서가 있는 곳을 사랑한다.


미국 드라마 길모어걸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사는 동네는, 미국의 서민들이 사는 작은 시골 동네다. 영화관도 없어 마을 도서관에서 쇼파와 의자 몇개를 두고 비치된 dvd를 빔으로 쏴서 본다. 소박한 주민들은 바보같은 구석도 많아서, 마을 주민회의를 할 때에도 코미디처럼 작은 일로 싸우고 의회를 소집하며 투표를 벌인다. 심지어, 주인공 로렐라이가 루크와 헤어지자 동네 사람들은 “누구 편이

될 것인가”로 리본을 달아 서로 니편내편을 갈라 의사표시를 하기도 했다. (슈퍼마켓에서 계산할 때 리본을 선택할 수 있었음)


난 늘 그런 황당하고 얼토당토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꾸만 세상이 나를 도시로 밀어낸다. 집 근처에는 그런 시골 감성이 있는 까페가 있다. 비영리단체에서 운영하는 까페인데, 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시간이 많은 할머니들 그리고 학생들이 모인다. 아마추어 혹은 무명의 예술가들이 전시를 하고 공연을 한다.


까페의 사람들은 때때로 말도 안되는 의견을 주고받으며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나도 몇번 화제가 되었으나, 전혀 신경 안써도 되는 이야기일 뿐이였다.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할머니들도 있는데, 그렇다고 특정인물을 감정을 담아 싫어하는 것은 아니였다. 그저 당신들의 의견일 뿐…


직원들은 고용된 사람들이 아닌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까페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젊은 층으로, 24세 이하는 최저시급을 받고 일한다. 때때로 손님들이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거나 토라지면 에라 모르겠다 싸우는 장면도 보게되는데, 정말 코미디 같아서 팝콘을 갖고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곳에서 전시를 열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난처하면 프랑스생활 꿀팁을 알려주는 할머니들이 늘 든든했다. 늘 그런 순진한 분들만 오시는 것은 아니다. 가끔 공무원들이나 기획인들도 들르고, 역 근처라서 일반인들도 많이 온다.


난 이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류작업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주민 할머니들은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까페에 걸으라는 제안을 수차례 하셨다. 하지만 내게는 그림을 걸만큼의 작업을 할 공간이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것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망가졌다. 그렇게 나는 미뤄왔던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로 결심했고, 인스타그램에 하나씩 아카이빙하는 모습을 본 까페 직원은 내게 그림을 걸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제대로 전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이미 스토리가 있었다. 내 이야기를 담고싶었던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작가노트를 적는 것은 어려운 일이 전혀 아니였다. 오히려, 이 작업은 스토리와 함께 동화가 되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엮기엔 너무 빠듯한 시간이였다.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져서 찾아낸 인쇄소. 집에서 멀었다. 북부에 위치한 이 곳은, 디자인 작업 전문 인쇄소라 가격도 합리적이고 퀄리티도 좋았다. 무엇보다 아주 친절했다.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근처는 치안이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곳을 올 때마다 파리의 정취가 가장 잘 느껴지는 곳처럼 느낀다. 럭셔리한 서쪽이나 트렌디한 마레 지구보다 내 감성은 북부와 훨씬 더 잘 맞는다.


보보시크한 공간으로 알려 생마르탱 운하 근처의 파리 중심부는, 사실 나에겐 별 감흥이 없다. 히피스럽지만 엄연히 중산층 특유의 반질반질함이 묻어있는 느낌이랄까. 그들에게 예술이란 것은 마치 "추구미"와 같이 느껴진다. 비건 식당, 독립 서점, 니치한 소품 가게... 모두 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련된 사람들은 예술인이라기 보다는 패션이 주업이 아닌 패션피플에 가까워보인다. 너무나 잘 다듬어져있다.


파리의 북부. 몽마르트 언덕을 지나, 라 샤펠 쪽으로 넘어가는 거리에는 낮에는 악기 소리가 들리고, 밤에는 거칠다. 치안이 좋지 않다고 알려진 동네이지만 어쩐지 나는 그 곳이 편안하다. 북부에는 예술가들이 많고, 거리에서는 가끔 악기 연주 소리도 들린다. 상권도 그 정서에 맞게 다소 날것이다. 거칠고 단단한 표면 아래 솔직하고 순수함이 스며있다.


집에 들렀다 오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까페에 들러 다른 작업을 하며 인쇄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체류증 연장과 관련된 메일을 받았다. 서류 제출 기한이 초과되었다며 처음부터 다시 제출하라는 알람이었다. 순간,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막막하고, 패닉이 올 것 같았다. 그 불안정한 상황에서 그 알람만 놓고 보면 아예 체류가 거절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그건 단순한 시스템 초기화였다. 제대로 잘 챙겨먹지 못하고 컨디션이 저하된 상태라 모든 상황이 극적으로 다가왔다.

처음 프린트 한 내 작업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이패드 화면은 원본 크기의 A2 용지보다 훨씬 작아서, 뽑았을 때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인쇄하고나면 원본보다 다소 칙칙하게 출력된다 해서 조금씩 채도와 명도를 높였는데, 그대로 출력되어 다음에는 굳이 그런 부차작업을 거치지 않기로 했다. 생각보다 예쁘게 프린팅 되어서 정말 뿌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크게 출력하고 보니 고치고 싶은 점,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작업을 머릿속으로 구상할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였다.



아마추어들도 편안히 작품을 걸 수 있는 공간, 서툴러도 환영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담당자는 싸늘했다. 그림의 분위기, 내용이나 의도보다는 눈에 띄는 색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하며 다 엎어버리자 했을 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전시가 결정되었고, 프린트까지 다 했는데,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담당자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주 좋은 반응이였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그림이 너무 작고,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고, 공간이 너무 빈다는 이유였다. 사실 크기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럼에도 담당자는 공간을 더 꽉채워야한다 주장했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그림 갯수는 충분했다. 오히려 너무 다닥다닥 붙여서 띄워서 붙여야 했는데, 저 그림들도 사실 반대하는 담당자를 제지한 한 젊은 여직원이 붙인 상태였다.



“이제 와서 왜…”


담당자가 차갑게 나오자 까페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 그림은 어느새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는' 가치 낮은 작업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기존 전시작들이 대부분 유화나 캔버스를 활용한 디지털 비(非)작업 위주였고,학생이나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참여자들도 많았다.


어설픈 터치나 흐트러진 구도, 추상화이지만 어떤 사유의 과정 없이 그려진 조금은 거친 작품들도 있었다. 그런 작업들이 이 공간 안에서는 오히려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작고 단정한 일러스트는 설명할 필요 없는 ‘장식’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였다.


이 공간이 전문적인 큐레이션이나 비평 구조가 마련된 곳은 아니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림의 배경이나 문맥보다는 크기와 질감, 혹은 눈에 띄는 인상이 먼저 작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주변의 현업 작가님들은 모두 "잘 하고 있다", "좋은 방향이다"라며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 말들이 단지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의 공기 속에서 묘하게 왜곡되어 전해지는 시선들이 나를 한동안 어지럽혔다. 그럴 땐 조금 고집을 부려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난 이런 작업을 처음 해보는 사람이고, 사전에 더 충분한 협의가 필요했다.
훨씬 정돈되지 않은 작업도 많았는데, 왜 유독 내 작업만 문제로 삼는 건지 모르겠다.”


조금 억지스럽지만, 프랑스인처럼, 목소리를 크게 내보았다. 그게 옳은 방식이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순간엔 내 그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그림은 그대로 걸렸지만, 한편으론 다른 방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열린 공간이라 해도, 비전공자에게 2~3미터 크기의 강렬한 색채 작업을 요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한국의 작가님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공간인 sns 플랫폼에 조심스레 나누고, 또 다른 친한 화가 분께 여쭤 조언을 받았다. 그렇게 매트보드를 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오데옹 근처 화방에 갔다.


기다렸다는 듯 갖가지 재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지, 펜, 붓, 잉크…
마음은 금세 들떴고, 손은 자꾸 무언가를 집게 된다. 그러다 문득, 계산대 앞에서야 현실이 떠오른다.

텅 빈 지갑...!! 하하하...

원했던 passe-partout는 검정과 흰색밖에 없었다.


시간은 촉박했고, 차도 없었고,
다른 화방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gpt에 검색을 했다. 내 그림들 뒤에 댈 가장 적합한 색을 추천해달라고...


버건디 색지가 가장 낫겠다는 의견에 따라
임시로 색지를 써보기로 했다. 예상보다 잘 어울렸다.


그 순간 가능한 선택지 중 가장 나은 해답이었다.


그렇게 요구사항에 맞춰 아침에 일찍 도착했는데, 더 붙였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림을 걸 때도 직접 사다리에 올라야 했는데, 그날 도와준 직원은 팔이 짧은 여성 한 분뿐이었다. 손이 닿지 않아 붙인 위치가 조금 어색했지만, 그 순간 가능한 최선을 다했다.

총 20장의 그림.


사람들이 혹시나 그림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작은 동화처럼 각 작품에 해설을 담았다. 누군가 그림 앞에 멈춰 서서, 짧은 문장을 따라 마음을 기울여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된 디지털 작업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글자를 보려면 자꾸만 눈을 찌푸리게 되고, 스크린을 멀리하다 다시 다가가기를 반복했다.

안토시아닌 보충을 위해 베리류를 곁들여 먹었다. 당시에도 낮 시간에는 집에서 인터넷 작업이 불가해서 까페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기엔 거리, 빈약한 와이파이, 시간제한 등의 불편함이 있었다.


캐릭터 설명을 위한 인쇄도 했다. 그런데, 글자가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다. 내가 쓴 글씨는 노년층 손님들의 눈엔 거의 깨알 수준이였다.


아이패드로 손글씨를 쓰는 일은 은근히 까다롭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작업이고, 그래서 더이상은 할 수없다고 타협하기로 했다.


직원 분의 안내에 따라 셀프 제단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제단기의 성능이 너무 허술했다. 내가 잘못한 줄 알았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도
결과는 똑같이 울퉁불퉁. 그래도 3유로의 수업료로 배운 건 분명했다.


첫째, 글씨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야 한다는 것.
둘째, 셀프 제단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엽서 크기로 잘 프린팅해주는 곳을 찾는 게 낫다는 것.



그렇게 담당자에게 단호하게 내 작업에 대해 존중할 것을 이야기하고, 모든 그림들을 떼어낸 뒤 색지를 덧대어 다시 여유를 두고 붙였다. 작품 설명은 엽서 형태로 인쇄해, 노끈에 집게로 매달았다. 불어로 간단한 해설을 적었고,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나는 이사 등의 문제로 매우 바빠 작품만 간신히 붙이고 까페에 자주 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 그 모든 엽서와 설명서들이 책장 한 구석에 흐트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하나의 꽃병이었고, 담당자가 물을 갈아주는 걸 깜빡한 탓에 꽃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비영리 기관에서 운영하는 공간이었고, 전시장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갤러리는 아니었기에 일정이 자주 엉켰다. 몇몇 분들이 그림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지만, 담당자가 따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 그 대화는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림은 한 장에 30유로에서 50유로 정도였다. 하지만 방문객들은 대부분 지역 주민, 사회적 약자, 노년층이었고, 나는 결국 작은 크기로 그림을 프린트해 나누어드리는 방식으로 전시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오프닝 때에도 담당자와 시간조율에 있어서 마찰이 있어, 오프닝은 전부 끝났다 하면서 없던일로 하자고, 이제는 음악 공연의 시간이라 주장했다. (원래는 오프닝이 있는 날에는 타이트하게 시간을 잡지 않는다. 동시에 연주 일정을 잡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곳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동네 주민들과 다른 사람들 덕에 찾아와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프닝 전시는 정말 감동이였다. 다들 바쁜데, 유명한 학교를 졸업하고 현업으로 작품활동을 하며 파리의 갤러리에 초대전을 열 정도로 뛰어난 언니들과, 디자인 학교를 다니며 웹디자인 작업을 하는 친구까지 직접 찾아와줬다. 공부하느라 바쁜 링링이까지...


게다가 음악이 있어서 오히려 뜻깊었다.


작가 언니가 건네준 노란 장미.
그리고 전직 발레리나이자, 지금은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총총하게 묶어준 섬세한 꽃다발.

멋진 사진을 찍는 언니의 최고로 맛있는 약과.

시인 프랑스인 친구의 벚꽃 향이 나는 화장품...


심지어 찾아와준 오빠들은 너무 바빠서 사진만 찍고 다시 논문을 쓰러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작가언니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따뜻한 조언과 함께 지지해줬다.


무엇보다 뜻밖의 기쁨은, 정말 우연히 카페에 들렀다가 내 그림에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과의 짧은 대화였다.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며, 해설을 읽고,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이야기처럼 공감해주기도 했다.


너무 정신없이 우당탕탕한 하루였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억력도, 시간도, 체력도 내겐 남아있지 않다.


서로의 오해나 작은 마찰, 혹은 보이지 않는 적의조차 그저 지나가도록 두기로 했다.


다행히,
그 모든 피로를 상쇄할 만큼의
새로운 만남과 예기치 못한 선물들이
하루하루 내게 찾아오고 있으니까.


그림을 좋아해주신 한 분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정확히는 그림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까지 귀 기울여 읽어주신 분이었다.

그분은 병원에 가던 길, 우연히 들른 까페에서
내 작업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붙여놓은 해설서—
그 안에 적어둔 '쏘피 꺌'에 관한 이야기도 눈에 띄었다고.
“맞아, 네게 그녀의 아우라가 있어.”
그 말 한 줄이, 며칠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앞으로의 음악 일정까지 응원하겠다는 말,
언제든 귀 기울이겠다는 시선.
무심한 듯 조용한 응원 속에서
나는 어쩌면 평생의 ‘편’이 생긴 것 같은 든든함을 느꼈다.


처음 이 기획을 시작할 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오가고, 향이 남는 순간들이 생긴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와준 분이 남기고 간
작고 향긋한 선물도,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진심을 알아주는 마음 앞에서
더 단단해지고 싶어졌다.


여러가지로 재밌고 황당한 에피소드가 많았음 Ex) 단골 할머니들의 눈이 좋지 않아서 파스텔톤이 안보이신다고 빨간색 케잌 그려주는 줄 알았다며 삐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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