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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스케치를 안한다.

by 사온

자랑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이다.
눈대중에 의존해 그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결과적으로 투시나 구도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 하나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색은 굳이 독창적일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조합 안에서 충분히 작업할 수 있다.

문제는 내 눈이 제법 높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만큼 완성된 그림을 공개할 때마다 자꾸 부끄러워진다는 점이다.


나는 스스로를 ‘독학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조금은 애매한 배움의 과정을 거쳐왔다.


대부분 혼자 그리다가, 필요할 때 주위의 미술인들에게 원포인트 조언을 받는 식이었다.

지금껏 선생님에게 제대로 배운 건 다섯 번 정도의 짧은 워크숍이 전부다.

모두 기초부터 다지되 너무 집착하지는 말만 들어왔다.

하지만 분명히 도움이 필요하다...


“완성을 위해 민첩하게 생각하고, 빠르게 그리는 것.”
“하나하나 그리지 말고, 전체적인 흐름을 먼저 보는 것.”


일종의 골조로 남아 아래의 그림이 스타일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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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높다는 건, 결국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고 명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색에 대한 기준도 더 까다롭다.


색감이 좋지 않다면, 감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각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그것은 ‘연구의 부족’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투시에 익숙하지 않으면 구도에서도 종종 불안정한 흐름이 생긴다. 특히 복잡한 장면을 정리할 때,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간지각능력은 객관적으로도 높은 편이다.
실제 검사 결과에서도 상위 점수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미술에서 공간을 다룬다는 건, 단순한 인지 능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실감하게 된다.


머릿속으로 구조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화면 위에 조형적으로 풀어내는 일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있다.


결국 그 간극을 메우는 건 ‘감각’이 아니라 ‘조합’이고, 그 조합이 곧 미감이라는 걸 그림을 통해 배워가는 중이다.


복잡한 장면과 예쁜 색을 그리면 시선을 끄는 건 사실이다.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인다’는 인상에 반응하니까. 대표적으로 위의 침대 그림이 그렇다. 백 장을 그려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내가 만든 한계에 갇힌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잘 못하는 것, 그리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채워야 할 부분들을 그냥 두고 싶진 않다.

내 작업이 더 멀리 가려면, 그 빈자리를 무시할 수 없다.






악기 연주는, 크고 빠른 곡보다 작고 느린 곡을 잘 연주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그 이유는, 그 곡이 연주자의 밑천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작고 느린 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다는 건,
이미 그보다 더 빠르고 복잡한 곡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대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겠다는 집착은 어쩌면 멈춰야 할 지점이자, 빠져나오기 힘든 늪일지도 모른다.


의욕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온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일상, 관계, 삶의 리듬까지 함께 흔들린다.


어디까지 밀어붙일 것인지,
어디서 멈추고 되돌아올 것인지,
그 선을 나는 이미 마음속에 그어두었다.


요즘 나는 아이패드로 드로잉을 한다.
기기 특성상 해상도는 A2가 최대치다.
그 안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그림이 어느 정도 '폼'을 갖춘다.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님들 중에는
굿즈나 캐릭터 디자인 자체만으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분들이 많다.


회화적인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벡터화한 작업, 그래픽 구조 감각 하나만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경우도 있다. 그 세련됨은 분명히 디자인 전공자만의 강점이다. 그래서 나도 그림의 규모를 줄여보려 했다.


최대한 간단하고 정제된 그림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더 세세해지고, 그릴 오브제가 자꾸 늘어난다. 사실 이번에도, 더 화려하게 연출하고 싶었다. 창문의 디테일을 살리고, 피아노의 질감과 그림자, 빛의 움직임까지 더 다듬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았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지금 내 작업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되묻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피아노 그림에 대해

보자르를 졸업한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색의 조합이었다.
피아노라는 오브제는 기본적으로 나무 재질이고, 색이 깊은 갈색이나 적갈색 계열이 많다.
그래서 뒷배경을 푸른색으로 설정했다.
색상 대비를 통해 입체감을 만들고, 시선이 고정되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더 나은 조합이 있었을까?
색에 대한 판단은 종종 너무 직관에만 의존하게 된다.
다시 보니, 문제는 단순한 색 조합이 아니라 배경을 포함한 구도 자체의 불완전함,
특히 투시에서 오는 미세한 불안감이었다.

‘배경이 간단하더라도 투시의 기본은 갖춰야 한다.’
이 말은 내게 명확한 경고처럼 들렸다.

두 번째로 막힌 건 질감 표현이었다.


요즘의 디지털 일러스트는 대부분 매끄러운 표현 위주다.
픽셀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거나, 벡터 기반으로 통통하게 구성한다.
포토샵 기반의 후처리로 풍성한 질감을 입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나는 그 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어설프게 따라 하면 오히려 진부하고 기계적인 느낌이 들었다.
특히 나는 만화 일러스트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 기법들에 거리감을 느꼈다.


'손그림이 아닌 것 같은 손그림', 그 미묘한 접점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국내에서 활동 중인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자료를 스크랩해 분석해봤다.
아마도 이 작업들은 단순한 색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후처리 단계에서 그림을 ‘그림 이상’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레이어를 쓰고, 어떤 블렌딩을 적용했는지.
그걸 묻기 위해 친구에게 질문을 준비했는데,
그 질문을 스스로 곱씹다 보니, 어느 순간엔 물을 필요조차 사라졌다.

이미 내 눈이 그 해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빛 표현도 늘 어려운 부분이다.
어떤 그림은 스쳐 지나가고, 어떤 그림은 시선을 붙든다.
그 차이는 결국 빛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친구가 보여준 예시에서는, 간단하게 레이어 하나를 추가해 발광 효과를 주거나
도트 하나만 찍는 방식으로도 인상을 남겼다.
결국 기본만 갖춰도, 나머지는 시간을 들여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구도.
이번 그림에선 피아노의 위치가 애매하게 잘려 있었다.
차라리 가운데 배치하고 창문을 대칭적으로 세 개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투시에 자신이 없으니, 자꾸 디테일에 집착하고,
피아노의 구조를 보여주려는 강박에 빠진 것 같았다.
그 강박이 그림을 오히려 무겁게 만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구도는 아마도 익숙한 시야에서 비롯된 것 같다.
연습실에서 늘 보던 피아노의 오른쪽 측면이 습관처럼 따라 나온 것 같다.
그 위치는 ‘연습의 시선’이었고, 가운데로 옮기면 마치 ‘연주의 무대’ 같아져서
내 의도와는 어긋난다고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사실은, 왼쪽에 과일 트레이나 고양이를 넣어 삼각형 구도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그릴 수 있는 능력부터 갖추고 싶었다.


답변

1. 빛의 경우 라이팅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보여준 자료의 그림들은 매우 단순한 연출. 발광닷지 효과로 레이어 하나 추가해서 점만 찍으면 그만인 정도라 기본만 갖추면 시간 두고 천천히 연습해서 스스로 따라잡을 정도.

2. 책 추천: 제임스 거니, 컬러 앤 라이트

3. 구도 안정적으로 잡으면 디테일 안들어가도 완성도는 있었을 것.


이 그림을 계기로 나는 한 번 더 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무엇이 부족한지 외부에서 답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중요한 건 스스로의 감각을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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