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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7일, 월요일 (GMT+2)파리 시간
누군가는 피카소의 그림이 그로테스크하고 난해해서 싫다고 말하면서도, 에곤 쉴레의 그림에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탄하곤 한다. 아마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이질감,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두려움의 영역은 나와는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나는 에곤 쉴레의 작품이 무섭고 끔찍하다. 누드가 아니더라도,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그림에서도 언제나 어떤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의 그림에는 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잔혹함이 배어 있었다.
피카소는 열정적인 작가였다. 많은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하면서도 결국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여성 편력으로 비판받는 경우도 많았고, 그러한 사생활은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한 혹평과 함께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에곤 쉴레는 조금 다르다. 그의 실체나 사생활에도 문제적 요소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이 작품성 자체를 훼손한다고 평가받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어쩌면 그 점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배경을 모를 때조차도, 그가 무서웠다. 그림 속에는 어떤 잔혹성이 있었는데, 피카소가 그려낸 전쟁의 고통이나 사창가의 여성들처럼 어떤 공유할 수 있는 감성에 기반한 고통이 아니었다. 정신착란에 가까운 고통, 일반적인 삶의 감각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공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세계였다.
나는 그런 작품들을 감당하기엔 감정적인 그릇이 작다. 예전에 한 미술관에서, 살해 충동을 느끼는 살인자의 심리를 묘사한 설치작품을 본 적이 있다. 전시장을 나와 돌아오는 길, 머리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버렸다.
물론 예술은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이며, 그것이 미학의 일부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로는, 공공의 공간에서 무방비하게 마주하게 되는 어떤 감정들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조율되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여성 편력과 예술적 욕망으로 비판받는 피카소의 작품은 강렬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 경계를 넘지는 않았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열기, 인간적인 광기.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좀 더 말할 기회가 올텐데... 서두르지 않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