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이름 위에 별을 그리다(1)

청주, 서울, 내일로 기차여행

by 사온


성인이 된 이후, 학교 근처의 작은 자취방에서 시작했습니다. 마치, 하울이 집을 지고다니는 것 처럼 저는 피아노를 업고는 걷고, 뛰고, 날았어요.


서울의 중곡동의 고시원, 고시원에서 또 다른 고시원으로, 그러다가 원룸으로, 그러다가 또 다른 원룸으로...... 해가 바뀔 때마다 습기와 소음, 외풍을 피해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옮기다가, 한국을 떠나 독일의 소도시, 프라이부르크로. 프라이부르크에서 아우(Au), 아우에서 메아딩안(Merdingen)으로, 하지만 체류에 실패하며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어 영국. 웨일스 공국의 페나스—베리, 영국의 글로스터, 비글스웨이드...


그리고 파리.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팬데믹. 첫 숙소였던 에어비앤비에서 몽마르트 근처로, 기간이 끝나자마자 파리 외곽으로, 하지만 집주인의 조건이 까다로워 다시 13구로. 13구의 플랫메이트가 대형 사고를 치고, 이사를 고민하던 찰나, 옛 몽마르트 집주인에게 연락이 와 11구로. 11구에서 생 제르맹 멍 레(Saint-Germain-en-Laye), 그곳의 집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결국 이브리 쉬르 센(Ivry-sur-Seine)으로. 그곳에서 가장 오래, 3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그리고 있는 ‘쿠쿠네네’ 일러스트 세계관의 미어캣 캐릭터 ‘링링’과 함께 파리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쿠쿠네네 일러스트는 일러스트 계정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

https://www.instagram.com/coucounene.atelier?igsh=Mm80YmJ6cWQ4dHc2&utm_source=qr


이번주 금요일, 저의 또다른 브런치북 에세이 <이 계절의 이름을 몰라도>에 연재될 이야기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서울에서 살 때 가장 괴로웠던 곳은, 난곡동이였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서 살아가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난(難)’—어렵고, ‘곡(曲)’—굽어진, 그 이름 자체만으로 마치 험하게 굽어진 길에 제 발로 찾아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제가 살던 방의 바로 옆에는 허리가 거의 반으로 접힌 듯한 연세 많은 할아버지 한 분이 살고 계셨는데, 그분이 쓰시던 화장실이 제 방 대문 바로 앞에 노출돼 있어 고역이였습니다.


다 큰 성인인 20대였지만, 아직 낯가림이 심하던 어린 시절이라 그 환경은 더욱 버겁고 우울하게 다가왔죠. 결국 엄마가 서울로 잠깐 올라오셨습니다. 덕분에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어요. 할아버지께 어머니가 이것저것 챙겨드렸고, 그날 이후 우린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화장실 관리도 잘 말씀드려 제가 집을 비운 시간동안에 문을 여는 등 상의할 수도 있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폐지를 줍고 돌아오시던 길에 시장 김밥 두 줄을 사들고 오셨습니다. 어머니와 저를 위해서였어요. 그 김밥이 어찌나 따뜻하고 맛있던지— 그 순간만큼은 서울살이가 조금 덜 외로웠습니다.


난곡동의 방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여름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더웠고, 나중엔 피부가 무를 정도로 견디기 힘들어졌어요. 하지만 어린 나이였기에 에어컨을 설치하고 부모님께 비용을 부탁하는 일조차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련했던 선택이지만, 그땐 제게 그것이 최선이었어요.


그 동네로 들어갈 때, 부동산 아저씨가 차를 몰고 가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습니다. ‘난곡’의 ‘난(難)’은 사실 ‘난초(蘭)’의 난자에서 왔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은, 그 동네가 결코 어렵고 힘든 곳만은 아니라는 걸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서울 마지막 자취방. 벚꽃길의 6층 작은 골방.

그 후, 저는 난곡을 떠나 가산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마침 그 즈음, 도로명주소로 정책이 바뀌었고


제가 머물던 곳의 주소는 ‘벚꽃로’가 되었죠. 피지 못한 난초가 언젠가 나무가 되어 화사한 벚꽃을 피우는 듯한 이름이었어요.


그곳에서의 1년은 처음으로 ‘버틸 만한 서울살이’였습니다. 작은 방이었지만 꼭대기 층이라 소음이 없었고, 주인 아저씨는 건물을 깔끔히 관리하셨으며, 방마다 에어컨이 있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엔 난방이 잘 되어 따뜻했습니다. 제겐 나름 평안했었는데, 그 시기에 저에게 찾아온 미국인 교포 친구는,


"얘, 너 거기 살 때 기억나? 난 네가 독일인지 프랑스인지 가서 이렇게 적응하고 외국어까지 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너 그 자취방 살 때 그 비좁은데서 내가 자고가는 것도 미안했어."


라고 말하더군요.


무튼 저는 행복했습니다. 얼어붙은 수도관을 녹일 필요도 없었고, 생활에 수고로움이 덜한 나날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피아노 선생님이 군입대를 하셨고, 저는 돌연, 음악적으로도 마음 둘 곳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어쩌면… 독일이, 더 쌀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희망 하나로 저는 또다시 짐을 꾸렸습니다.



이 곳은 지금도 여전히 제 방인, 충청북도 청주의 본가에요. 당장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라, 창밖 풍경만 보여드립니다. 작은 방이지만 꽤나 근사하죠?


역마. ( 驛 馬 )


어깨 허리 모든 곳이 단단히 뭉쳐 침을 맞으러 가면, 장님 할아버지께 종종 듣던 사주팔자 이야기. 제 사주에는 그 유명한 역마 “살”이란 글자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사느라 고단해질 수 있다는 살.


아니 그런데, 그 살이란 것이 풀어야할 정도로 사람을 괴롭게하고, 고통스러운 것인가요? 글쎄요.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방학 동안 ‘내일로’ 기차여행을 떠났습니다. 청년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기차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그 패스 한 장으로, 저는 경상도에 있는 친척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부산–경주–영천–영주–밀양을 돌았죠. 당시 저는 고미술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교과서에 실린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네요.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보려면, 아마도 그때 찍은 사진과 낡은 노트들을 하나하나 들춰봐야 할 겁니다.

지금 파리에 있다는 사실이 문득 아쉽게 느껴집니다. 언젠가,〈내가 사랑하는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시절의 기록을 다시 연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처음 유럽에 발을 디뎠을 때의 저는 매 순간이 마지막일까 봐, 다시는 유학을 이어가지 못할까 봐, 모든 하루하루가 소중하면서도 조급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한국을 과연 언제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 그마저도 더 이상 확신이 서지 않네요.


초반의 이야기는 모두 스토리의 진행에 맞게, 일어난 사건의 순서가 아닌 스토리 전개의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축약본처럼 빠르게 진행되는 초반의 전개는 뒷 이야기에 더 풍성하게 사진과 함께 제공됩니다.

원래는 화, 목 연재인데 온라인 연재 특성상 짧게 이어가야하는 특성도 무시할 수 없고, 구독자님 한 분께서 더 많은 회차를 많이 보고싶다는 의견을 내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재일 무관한 날에도 게시하기로 했습니다. 한 분의 의견이라도 모두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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