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여름
유럽의 여름은 찬란하다 못해 강렬하다. 외곽으로 조금만 나와도 아니 도시의 공원안에서도 탑리스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유럽의 여름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선베딩하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사실 최근 몇 년동안 보인 급격한 기후변화 이전에는 유럽의 여름이 뜨겁긴해도 습도가 낮아 한국보다 여름을 나기가 더 수월했다.
여름은 유럽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이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사는 유러피언들에게도 마찬가지. 10월 써머타임이 끝나면 강렬했던 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4월까지 기나긴 겨울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여름은 더없이 소중하다. 부지런히 겨울을 버텨낼 수 있는 에너지를 몸 속깊은 곳까지 축적해야한다.
그리고 바캉스의 계절이 아닌가. 내가 15년 전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에는 8월 한 달은 정말 큰 일부 슈퍼마켓을 제외하고 모든 상점이 tutto chiuso 였다. 그들도 여름을 즐겨야하기 때문에 다들 ferie를 떠난다. 사실 8월은 바다나 산으로 모두 떠나기 때문에 도시와 마을은 텅텅 빈다. 하지만 주재원으로 있던 남편은 고작 1주일의 휴가밖에 쓸 수가 없었으니 나와 어린 내 아이들은 아무도 없는 8월을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다.
2023년의 이탈리아는 놀랍게도 15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물론 밀라노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다. 8월이면 모두 문을 닫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8월 15일 Ferragosto 휴일을 기점으로 2주 정도만 쉬고 대부분의 상점은 정상영업을 한다. 사실 15년 전에는 주말에도 슈퍼마켓을 비롯해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아 이런 나라가 어딨나 싶었는데 이제는 웬만한 공휴일이 아니면 슈퍼마켓은 매일 문을 열고 상점들도 주 5일 근무를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여름은 어떨까. 이제는 많이 알려졌듯 유럽 대부분의 아이들은 긴 여름방학을 보낸다. 그 와중에도 이탈리아의 국공립 학교를 다니는 경우 장장 3개월의 여름방학을 보낸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00일의 방학이다. 보통 6월 10일 경부터 방학이 시작되고 9월 15일 경에 개학을 한다. 1년 중 1/3 이 여름방학이네.
이 긴 여름방학을 이탈리아 아이들은 무얼하며 보낼까? 여기는 한국처럼 학원도 없고 학습지 선생님도 없는데 말이다. 이곳의 부모들도 대부분이 맞벌이인데다 이제는 예전처럼 8월 한달을 통째로 쉴 수도 없으니 아이들의 긴 여름방학이 이들에게도 큰 걱정거리이다.
그래서 6월부터 7월까지는 campus estivo 라는 여름 캠프를 보낸다. comune-동사무소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에서나 chiesa-교회나 성당-같은 곳에서 하는 pubblico 캠프가 있고 아니면 수영이나 테니스, 축구 등을 하는 스포츠 캠프를 보낸다. 그리고 8월은 이제 산이나 바다 또는 조부모나 사촌 집으로 가서 한 달을 보내는 것이다. 특정 캠프를 제외하고 꼬뮤네나 성당 같은 곳에서 하는 여름캠프는 말그대로 보육 수준이라 비용 또한 저렴하다. 스포츠캠프나 아트캠프, 영어캠프는 아무래도 비용이 높은데 300유료/일주일 정도가 평균이라고 보면 되겠다. 6월이 되면 이탈리아 부모들은 아이들 여름캠프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자 이쯤되면 방학도 한국보다 긴데 학원도 없으니 이탈리아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부모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든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정말 아이들은 긴 방학이 좋을까, 그리고 이탈리아 부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탈리아의 남북 경제규모 차이는 워낙 잘 알려져있다. 구글에 GDP tra SUD e NORD in ITALIA 로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바로 알 수 있다. 2021년 1인당 GDP로 볼 떄 중북부 지역은 33,400유로이고 남부 및 섬은 18,500유로이다. 중북부가 2배 가깝게 높은 소득수준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극심한 소득격차가 이탈리아 하면 나타나는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만들어내는 제 1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공공서비스나 교육서비스에 균등한 재정적 지원이 불가능하니 초등학교까지만 무상급식이고 중학교 이후 부터는 급식이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만 오후까지 수업을 하고 4시에 끝나고 중학교 이후는 1시에 끝난다. 공교육에 대한 국가 재정적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보니 점점 사립학교나 국제학교를 다니는 이탈리아인이 늘고 있다. 물론 밀라노 기준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국제학교만 하더라도 큰 애들이 입학할 당시 30%-40%수준이었던 이탈리아인 비중이 코로나 이후에는 거의 50%에 육박할 정도이다. 해마다 입학예정으로 대기명단에 올려지는 이탈리아인들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아이들 학교의 경우 여름방학은 7월, 8월 두 달이고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방과 후 활동 포함 4시 30분까지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학원 선생님이 우스개 소리로 북부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노라기 보다는 유러피언이라고 말했는데 아마 대다수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이 말에 동의할 듯하다. 이곳의 여름을 얘기하다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글이 이어졌을까 싶은데, 길고 긴 여름이 풍족함과 직결되는 것이 아닌만큼 15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이곳의 학부모들도 1시까지 밖에 수업하지 않는 고등교육에 불만이 많고 이어지는 청년 실업률에 골머리를 앓는다. EU 여타 국가보다 낮은 임금수준으로 고학력자들은 해외로 취업을 하러 외국으로 빠져나가 인재부족이라는 문제도 매해 지적되고 있다.
이들 역시 여름 바캉스를 보내는 데에도 부자의 여름과 서민의 여름이 다르다. 흔히들 상상하는 프라이빗 비치에서 선베딩하다 밤에는 멋지게 차려입고 저녁식사하러 나가는 유럽인의 휴가는 그래도 있는 자들의 바캉스이다. 이민자나 서민은 온갖 음식과 선베딩 파라솔과 의자를 들고 도심에서 가까운 호수나 바다에 가서 휴가를 보낸다.
양극화의 물결은 마냥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도 스며들고 있는 개 현실이다. 2-3주의 여름휴가를 위해 1년을 일한다는 이탈리아와 유럽 역시 서서히 변하고 있다.
길어도 너무 긴 이탈리아의 여름방학.
어떤가요? 이탈리아의 아이들이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되는 백일의 여름 방학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