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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OSONO Jun 16. 2023

밀라노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소하고 시시한 일상 이야기

 큰 아이는 어제 그토록 고대하던 스쿨트립을 떠났다. 한 명이 없다고 도시락 싸는 것도 수월하다. 둘째 딸과 막둥이 도시락과 간식을 챙기고 서둘러 학교로 실어나른다. 일년에 한 번 보는 기말시험이 지난 주 막 끝난 터라 이번 주는 정상수업 대신 체험활동이나 야외활동으로 한 주가 채워질 예정이다. 둘째 딸은 오늘 숲 체험을 위해 근교로 나간다고  한껏 들뜬 채 학교로 향했다. 애들 시험이 끝났는데 마치 내가 시험이 끝난 것처럼 나 역시 홀가분한 기분이다. 여느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애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와 바로  커피를 내린다. 커피 향에 코를 킁킁거리며 소파에서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짝꿍에게 말을 건다.


" 뉴스 봤어? 이제 진짜 만 나이로 바뀌는 건가보네"

네이버 화면을 스크롤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만 나이 기사를 클릭해 본다.  한 살이 더 드나 덜 드나 2023년의 박은영이 일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러운 느낌이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남편도 한마디 거든다.

" 뭘. 내가 48살인데 주민등록상 생일이 안지났으니 46살. 그렇다고 내가 2년 전으로 몸 상태가 회귀하는 건 아니잖아, 별 것도 아닌 일 아니야?"

 남편과 나이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산 지 도합 십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남편이 이제 지천명이 눈 앞에 있다는 것보다 타지에서 이렇게 오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렇다. 대학입학 후 살기 시작한 서울에서 결혼 전까지 십 년을 채 못 살았는데 이 곳에서 십년이 넘게 살고 있다니 새삼스럽다.

정말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마저 한 마디 보탠다.

"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오래 살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러니 앞으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도 누가 알겠어? 인생 참 모르는 거야"



 남편과 나는 같은 회사에서 만나서 결혼한 사내커플이었다. 과거형으로 끝나는 이유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이 밀라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나는 회사를 관두고 주재원 아내로 보직 변경을 했기 때문이다. 15년 전만 해도 유럽으로 거기다 밀라노로 주재원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경력이나 연차가 똑같았던 우리 부부였지만 나는 당연히 회사를 관둬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쩜, 그다지도 아무 생각없이, 경단녀의 길로 선뜻 들어섰을까 싶지만 그 때 당시의 나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과 둘만의 해외생활을 한다는 단꿈에 젖어 미련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주재원 아내라는 타이틀은 여러모로 근사해보였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 때 당시 32살의 젊은 대리가 밀라노로 발령이 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러시아나 동유럽이 아니라 서유럽이라니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여튼 남들이 보기에는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시부모님도 아들 직장 어디냐고 누가 물으면 회사 이름 대신 이태리 밀라노에서 살아요라고 대답하시곤 했다. 제주도가 고향인 내 경우는 어떻겠는가. 우리 부모님도 당연히 결혼하고 유럽, 밀라노에서 살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했다. 밀라노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나 역시 그것에 으쓱한 기분으로 주재원 아내임을 뿌듯해 하며 밀라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근사한 유럽 살이에 대한 기대와 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남편은 한국에서 그랬듯 9-6는 커녕 하루 24시간이 모자라서 주말에도 때때로 출근을 하며 그야말로 일에 치여 지냈다. 꿈꿔왔던 여유로운 유러피안 라이프와는 동떨어진, 그저 일터가 한국이 아닌 밀라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박봉의 월급쟁이와 독박육아로 허덕이는 30대 젊은 부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났고 경험치가 쌓여 어느 정도 내성과 내공이 생겼다지만, 그 당시의 나는 서울-제주 비행기 말고는 해외에 나가 본 경험이 전무했기에 더듬거리는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에서 사는 일은 사실 굉장히 힘들었다.  스마트폰도 없어 실시간 검색은 커녕 탐탐 네비게이션으로 종이지도를 참조해가며 길 찾아 다니던 시절이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뒤돌아 보면 뭘 모르고 시작했기에 꾸역꾸역 살아냈던 것 같다. 그래도 남들은 돈 주고 온다는 유럽 그것도 밀라노에서 돈 벌며 살고 있으니 우리는 복 받은 거다.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그 시절을 지내왔던 것 같다.

지금 아니면 유럽에서 언제 살아볼 수 있겠냐 뭐 그런 마음으로 지탱해 왔다고 봐야지. 그렇게 한 해 두 해 살고 5년의 임기가 채워지고 큰 애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우리는 귀임했다. 귀임할 때조차 남편은 후임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해야하느라 나와 아이들만 먼저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큰 애를 낳을 때부터 시작한 독박육아는 한국으로 귀임하고 나서 셋째를 낳고 나서도 죽 계속되었다. 남편은 항상 바빴고 늘 일이 많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바쁜 남편은 더 바빠졌고 게다가 더 늦고 더 많이 술을 마시는 일이 허다했다. 2년을 그 생활을 버티던 남편은 다시 해외근무지로 자원을 했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밀라노로 돌아왔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두번째 해외살이가 그렇게 다시 시작된 것이다.


 삼년 만에 다시 돌아온 밀라노는 놀랍게도 처음 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늘 장을 보던 슈퍼마켓 에셀룽가의 진열대조차 바뀌지 않아 마치 며칠 전 그곳에서 장을 봤던 기분이었다. 삼 년전과 달라진 것은 이제 더 이상 꼬물꼬물 아기들이 아닌 애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바로 내가 육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는 점,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유럽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다시 돌아온 밀라노에서 나는 그제서야 내가 유럽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시작하는 밀라노 생활은 반짝반짝했다. 지점장으로 승진한 남편의 연봉은 예전보다 인상되어 우리 생활은 예전보다 윤택해졌다. 남편은 여전히 바빴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예전보다 자주 여행을 다녔고 세일 때마다 쇼핑을 했고 맛집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느리긴 했지만 아이들도 서서히 국제 학교에 적응을 했다. 뭔가 그간의 노고가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 나 홀로의 여유를 즐겼다. 아이들 학교의 한국엄마들의 무리 속에서 이방인의 아쉬움을 달랬다. 적당히 여유로웠고 적당히 무료했다. 그렇지만 이런 안정적인 생활은 남편의 귀임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막을 내렸다.

 밀라노의 대표적인 건축물 밀라노 두오모 앞에서 둘째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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