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오지랖 주의
제목을 입력하세요....
분명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켜고 브런치 글쓰기 화면을 띄웠는데, “제목을 입력하세요" 이 문구를 보니 머릿속에 맴돌던 모든 글감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이럴수가. 불과 몇 분전까지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무슨 곡할 노릇인가.
어렸을 적 나는 깜빡 잊었던 숙제도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잽싸게 해치우고, 미쳐 챙기지 못한 준비물도 얼렁뚱땅 다른 반 친구에게 빌려서 해결할 정도로 임기응변에 강했다. 수업시간에 예상 밖 질문을 선생님이 내셔도 어쩜 너는 그런 생각까지 하니? 라고 하실 정도로 요샛말로 하면 센스가 타고났다고나 할까, 눈치가 빠르다고나 할까 뭐 그랬다.
그런데 시대는 흑백텔레비젼이 컬러텔레비젼이 되고, 이제 텔레비젼 대신 태블릿과 핸드폰을 사용하는 그야말로 문명이 개벽하고 있는데, 임기응변에 센스와 눈치까지 장착했던 어릴 적의 나는 방금 전까지 머릿속 글감도 잊어버리는 그저그런 40대 후반의 아줌마로 퇴행해 가는것 같아 순간 울컥해진다. 울컥한 기분이 울적해지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얼른 심호흡 크게 한번하고 오늘 아침부터 내 행동노선을 찬찬히 떠올려본다.
여행을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빨랫감이 한가득이다. 그래서 남은 빨래를 돌리고, 식구들 아침 챙기고, 남편 출근시키고, 라면이랑 찬거리 사러 중국슈퍼에 갔는데.....아!! 맞다. 이제 생각났다. ...어휴 다행이다.
그렇다. 중국슈퍼에서 있었던 일을 적으려고 컴퓨터를 켰었다. 라면이며 콩나물같은 야채를 사려고 중국슈퍼를 갔다. 8월 바캉스 시즌이 끝나고 내일이면 9월이지만 아직 시내 도로는 한가로웠다. 평소보다 금방 도착한데다가 슈퍼 앞 주차칸이 비어 바로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작은 중국슈퍼지만 한국라면이나 된장, 간장, 고추장 같은 한국식품이 꽤 있는데다 한국슈퍼보다 싸고 멀지않아 종종 가게 된다. 오늘도 여느때처럼 항상 사는 간장과 물엿, 된장을 장바구니에 넣는데 통로에 놓인 장바구니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어랏.내 장바구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진라면 매운맛과 팽이버섯, 부추, 콩나물이 보이는게 아닌가. 이는 필시 한국사람의 장바구니이다!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둘러보니 30대로 보이는 남자 둘이 장을 보고 있었다. 안듣고 안보는 척 했지만, 이미 내 귀는 토끼귀만큼 쫑긋 세워져 아주 미세한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인 남자들이었다.
얼핏 들리는 말이 한국간장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손에 일본 기코만간장을 쥐고 있는데...아....한국간장을 찾는가보다. 한국간장 저쪽 다른 코너에 있다고 말해줄까 말까..입이 너무 근질근질...어쩌지...말해주고 싶다. 말해주고 싶다...
"저기요, 한국 분이시죠? 저쪽에 보시면 한국간장 있어요."
......
"네? 아 네~"
나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줄 알고 다시 한번 더
"저 쪽 선반에 보시면 한국간장 있다고요."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 놓고 계산을 끝내고 돌아 나오는데, 그 한국 남자들이 일본 기코만간장을 계산대에 올려놓는 것을 보았다. 거참 저 사람들 희한하네. 한국간장을 못찾는건가?
나는 호의라고 생각해서 망설이다가 두번이나 한국간장 저기 있다며 말했는데 그냥 한국아줌마의 오지랖이었나 하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뒤섞여 밀려왔다. 그런데 곰곰히 더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들은 한국간장을 찾는 대화를 한 게 아니라 한국간장과 일본간장을 비교하는 대화를 했을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들이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나 혼자 지레짐작으로 한국간장을 찾고 있는다고 추측했던게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그들은 모르는 한국인이 본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생각하고 불쾌할 수도 있었겠다. 자신들이 간장얘기하는 것을 듣고 한국간장사라고 참견한 꼴이다. 어이구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된다. 다시는 이런 괜한 오지랖은 지양하기로.
가만...이런게 요새 사람들이 말하는 꼰대같은 그런 건가. 아줌마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