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부활절 방학은 2주에 가까울 정도로 꽤 길지만 방학식 당일도 시험이 있고 방학이 끝나고도 이미 공지된 시험이 줄줄이 있어 큰 애가 영 내키지 않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디든 가고 싶다 병에 걸린 이 애미와 방학 내내 할 일없이 유튜브와 한 몸이 될 막둥이를 불쌍히 여긴 우리 집 가장의 추진력으로 우당탕탕 급하게 이탈리아 발굽 지역인 풀리아 -Puglia 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은 4박 5일 같은 3박 4일 일정이었다. 이제는 막내가 9살이 되니 새벽에 일어나 출발하는 것이 힘들지 않아 비행기로 여행을 가야 하는 경우는 가급적 새벽 일찍 출발하는 일정을 짠다. 남편과 나의 여행 스타일은 둘러볼 지역만 대충 정해놓고 그날그날 상황에 맞게 찾아보며 다니는 건데 아이들과 항상 같이 다니므로 너무 빡빡하게 일정을 짜는 것은 여행이 즐겁지 않고 마치 숙제 같은 부담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가는 풀리아 지역은 워낙 소도시들이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보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빡빡한 일정을 짤 필요도 없었다.
출발하는 날 첫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밀라노에서 동북쪽 47km 떨어진 베르가모에 있는 카라바죠 공항으로 서둘러 갔다. 인당 30유로 밖에 안 되는 싼 가격에 홀려 악명 높은 라이언에어-아일랜드 저가항공-를 예약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늦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으려 카운터에 갔다. 체크인을 하려고 예약한 종이를 내보였는데 아뿔싸, 2시간 전에 앱으로 셀프체크인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렇지 너무 수월하다 했다. 남편이 강경한 어조로 직원에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정책이 그렇다며 할인가가 아닌 정가로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크인 완료시간은 다가오고 어쩌겠는가. 250유로를 지불하고 얼른 털어버리고 비행기 타야지. 1시간 조금 넘는 비행 뒤 바리에 도착해 보니 8시도 채 되지 않는 시각이다.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으러 공항 밖을 나오니 이런 엄청나게 비가 쏟아진다. 비예보가 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이렇게 쏟아지다니 너무 당황스럽다. 설상가상 우리가 예약한 렌터카 업체는 공항 렌터카 구역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세찬 비를 꼴딱 맞아야 했다. 설렘 가득했던 여행이 예상치 못한 투펀치에 너덜너덜해진다. 남편이 고군분투하며 렌터카를 가지고 와서 부랴부랴 차를 타고 여행을 시작해 본다. 그래 오랜만의 여행이다. 이 정도의 난관은 여행할 때 있어줘야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다고 쫄딱 젖어 최악의 여행이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달랜다. 하지만 이는 나의 착각이었다. 여행이 끝날 때 또 한 번의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바리에서 폴리냐뇨 아 마레까지는 해안가 남쪽을 따로 3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이라 3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는 한참 남아 우리는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어슬렁어슬렁 이 지역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폴리냐뇨 아 마레의 이 절벽 앞바다 스팟이 여러 sns에서 보였다. 이탈리아 풀리아를 검색하면 항상 나오는 모습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당시는 날씨가 흐려 우중충했지만 다음 날 해가 비추어 보여지는 풍광은 청량함 그 자체였다.
새벽부터 움직였던 터라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팠다. 구글에서 맛집을 검색해본다. 이제야 점심 영업을 시작하는 때라 사람들이 붐비기 전에 얼른 들어가야겠다. 음식까지 실패하면 여행의 의지가 꺾일 것 같아 안전하게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전형적인 이탈리안 식당을 찾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평점 4.2의 리뷰수가 1000이 넘는 식당이 있다. 더 잴 것도 없이 앞장서서 들어선다. 소박하지만 깔끔한 식당이다. 각자 먹고 싶은 피자며 파스타, 그래도 바닷가 마을을 왔으니 해산물도 시켜야지 싶어 안티파스토-antipasto,전식요리로 문어를 시켰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하늘도 점점 개이고, 사람들도 거리마다 거닐어 제법 관광지 느낌이 났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마을이 그렇듯 구시가-centro antico 지역은 과거의 정취며 모습이 거의 대부분 보존되어 있고 그런 구시가지를 둘러싸거나 따로 나뉘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시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마을은 그야말로 소도시, 하루면 둘러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이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여서 여름철 바닷가 휴양 목적이 아닌 우리들은 숙소에 체크인하기 전에 구시가 대부분을 충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이곳은 이탈리아 남쪽 바닷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여름이 길고 뜨겁기 때문에 길바닥이며 건물이 모두 하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메인 거리를 벗어나 뒷골목으로 들어가보니 식당과 기념품 가게 대신 가정집들이 즐비했다. 북부 밀라노와는 다르게 집 대문들이 보통의 대문들보다 높이도 크기도 작았다. 자세히 관찰해 보니, 집 대문뿐만 아니라 창문도 내가 보던 것보다는 크기가 작고, 가로는 짧고 세로가 긴 형태였다. 남부 지역의 길고 뜨거운 여름을 견디려면 자연스레 외부 열이 들어오는 것을 최소화해야 하므로 이렇게 지었겠지 싶었다.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숙소 체크인 시간이 가까워져 호스트에게 전화를 해 본다. 2일을 예약해 둔 숙소는 저녁을 해 먹을 요량으로 에어 비앤비 아파트였다. 체크인 시간이 가까워서야 호스트로부터 숙소 주소를 메일로 받았다. 그리고서는 마치 미션을 해결하는 것처럼 숙소 비밀번호를 받고 보관된 열쇠를 찾아내서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다. 아무래도 새벽부터 움직였던 터라 다들 피곤했다. 한참을 쉬고 저녁을 먹으러 다시 구시가지로 들어가 본다. 낮과는 다르게 노랗게 켜진 조명이 바닷가 마을을 더 낭만적으로 만들어 준다. 미리 얘 약해둔 식당의 좋은 서비스와 맛있는 음식으로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피곤함도 풀리고 여행의 기대감이 다시 차오른다. 그렇게 유독 길었던 여행 첫날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