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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by 불친절한 은자씨

베네치아는 나에게 신혼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다. 남편 따라 이탈리아로 오게 되었을 때 처음 갔던 곳이 바로 베네치아였다. 그 당시 남편은 결혼식 때 잠깐 한국으로 나와 겨우 식만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다. 우리는 결혼식만 겨우 끝내고 신혼여행도 건너뛰고 밀라노로 들어왔다. 신혼여행 못 가는 건 전혀 아쉽지 않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신혼생활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주말마다 여행 다닐 생각에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은, 주말여행은커녕 남편은 토요일 출근에 일요일은 골프강제 출근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이어서 나 혼자서 밀라노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기대와 다른 밀라노 생활은 지루하고 쓸쓸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7월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일요일 남편이 일어나자마자 베네치아에 다녀오자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신청해 둔 차도 아직 나오지 않았던 때라 차창문도 수동으로 올려야 하는 연식이 언제인지도 모를 파란색 punto 차를 끌고 가야 했지만 차가 대수랴. 7월을 향하던 때라 날씨도 더운데 당연히 에어컨도 안 나오는 그 고물 차를 타고 밀라노에서 200km 떨어진 베네치아로 부릉부릉 열심히 달려갔다. 고속도로에서 창문을 열어두고 달리는데 차 엔진소리며 바퀴소리에 귀가 나가떨어져 나갈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베네치아 가는 길은 즐겁기만 했다.


베네치아 본섬에 들어가기 위해 수상버스를 타고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밀라노 두오모도 보지 못했던 때라 산마르코 광장의 두깔레 궁전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이렇게 화려하고 압도적인 규모라니. 어떻게 사방이 바로 바다인데 이런 광장과 궁전을 만들 수 있던 걸까. 건물과 건물 사이의 바닷길 위로 다니는 곤돌라는 당연히 두말할 필요 없이 이색적이고 아름다웠다. JUST GO 이탈리아 여행 책에서 봤던 건물과 풍광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렇지 이런 그림이 바로 내가 기대했던 이탈리아의 모습이었다.

여름의 베네치아는 밀라노보다 훨씬 더웠고 습했다. 게다가 바다가 사방에 둘러싸여 있어 짠내까지 뒤엉켜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남편과 오랜만의 여행이 신나기만 했다. 신혼여행을 못 간 아쉬움이 싹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베네치아를 관광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게 방향표시판이다. 화살표로 주요 관광포인트의 위치가 골목 벽에 표기되어 있는데 잠깐이라도 이를 놓치면 미로 같은 베네치아 골목을 헤매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골목길을 헤매는 것도 재미있고 그냥 베네치아의 모든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누구나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구글맵으로 길을 찾지만 그때에는 여행서를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때였다. 여행서를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들어간 식당에서 한참 고민하다 메뉴를 골랐던 기억이 있다. 이태리어는커녕 간단한 영어도 입에서 잘 안 떨어지던 때라 모든 게 어리바리했다. 그래도 나보다 몇 개월 먼저 이탈리아 생활을 시작한 남편이 요령 좋게 내 입맛에 맞는 메뉴를 주문했다. 카프레제와 스캄피-딱새우 파스타, 치킨 요리를 시켰는데 하나같이 너무 맛있었다.

영화 속 배경 같은 베네치아에서 그날 남편과 나는 제대로 된 신혼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베네치아의 상징 곤돌라
리알토 다리(좌)와 산마르코 광장의 노천카페(우)

이후로도 베네치아는 한국에서 가족들이 올 때마다 한 번씩 꼭 찾았다. 하지만 최근에 간 것은 벌써 5년 전이다. 이미 여러 번 다녀와서 더 가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베네치아의 넘쳐나는 관광객으로 이제는 예전에 갔을 때의 감흥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인 듯하다. 게다가 기후변화로 매 년 aqua alta 시기가 길어지고 침수로 인해 피해가 반복되고 있으니 이제는 베네치아를 가지 말아야 하는 게 이 도시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네치아와 같이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도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긴 하다. 베네치아 보존을 위해 연 방문객을 제한해야 한다는 안건도 제시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역 거주민들이 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관광객이 줄면 대부분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거주민들의 수입도 줄기 때문이다. 베네치아가 침수되면 그들의 터전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당장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까 그저 모르는 척하는 현실이다. 어쩌면 몇 십 년 후에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다녀왔다는 것 자체가 기가 막힌 자랑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내 신혼의 장소가 기후변화 속에서 다시는 가 볼 수 없는 과거의 도시로 묻힐 수도 있다니 씁쓸하면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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