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를 여행이 끝나고 한참 뒤에 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짧은 글꼭지를 남겼기에 큰 문제없이 여행기를 쓸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생동감이 떨어진달까 뭔가 필력으로 여행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진에 의존하여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는 것 또한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랄까. 머릿 속에서 붕붕 떠다니는 흐리멍텅한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려니 여간 힘든게 아니다.
올리브 농장에서 15분 남짓 거리에 있는 Ostuni-오스투니 지역의 첫 인상은 말 그대로 tutto bianco 하얀 마을이었다. 스페인 남부 쪽으로 가면 하얀마을로 유명한 프리힐리나 지역이 있는데 그 마을처럼 오스투니도 못지 않은 하얀색 천지였다. 사실 로마보다 더 아랫쪽에 위치한 남부지역의 여름은 뜨겁고 강렬하다보니 최대한 해를 피하는 게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의 건물은 죄다 하얀색에 건물의 벽은 또 어찌나 두껍던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서 골목은 기다란 그늘이 만들어지게끔 되어 있었다.
오스투니 첸트로 스토리코-구시가-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약 5분거리의 주차장에 주차를 해두고 올라가야 한다. 이 마을은 언덕위에 형성되어 있는데다가 구시가와 신시가가 나뉘어져 있어 구경을 하려면 천상 걸어 올라가야 했다. 골목이 굉장히 많아 구경을 하는 내내 미로를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trulli만 남아있어 마치 관광상품을 만들어 놓은 듯한 알베로벨로보다는 정리되지 않아humble한 분위기의 이 마을이 더 흥미로웠다.
다소 경사진 길을 올라가다보면 뜻밖의 건물이 나타나기도 하고 골목길을 헤메이다 보면 뜬금없는 곳에서 광장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예상 밖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4월의 오스투니는 한여름만큼의 더위는 없었지만 그늘 밖의 해는 꽤 강렬해서 그늘만 벗어나면 눈이 너무 부셨다. 게다가 오전에 올리브 농장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아이들도 여기저기 뛰어다닌 터라 경사를 계속 걷다보니 금방 허기졌다.
여행할 때 촘촘히 계획을 세우지 않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타입이라 식당을 미리 예약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너무나 유용한 사람이 바로 나이다. 스마트폰없이 어떻게 여행하고 다녔나 싶을 정도이다. 현 위치에서 반경 500m 이내의 평점 4.0이상의 지역향토식당 구글검색을 하면 좍 뜨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이 다음부터는 나의 느낌대로 골라가는 거다. 이곳에 오면서부터 나는 반드시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음식이 이미 정해져있었다. 여기는 cima di orecchiette라는 파스타라고 유명한 향토음식이 있다. 물론 유명하다고 꼭 다 맛있거나 우리 입맛에 맞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메뉴는 정해졌으니 내 눈에 띈 식당에 서둘러 전화를 해본다. 여행을 오면 짧은 이태리어도 마구 남발할 정도의 용기가 생기는데 아마도 관광객의 치기가 아닐까. 나를 누가 알겠어 싶은 마음으로 평소와 다르게 이태리어를 열심히 내뱉곤 한다.
이렇게 찾아간 레스토랑은 작지만 귀여웠고 은근 솜씨좋은 가정식 맛집이었다. 여행을 와서 이런 맛집을 찾아내면 이 또한 얼마나 기쁨인지 여행지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성취감이다.
나와 남편은 오레끼에테 파스타를 시켰고 아이들은 라구 파스타와 피자를 시켰다. 오레끼에떼 파스타는 말 그대로 귀모양 파스타인데 손반죽이라 식감이 수제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내가 주문한 cima di orecchiette는 무청을 의미하는 건데 한국에서 삶은 무청 시래기 나물 먹는 것과 비슷한 맛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식당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보니 작은 미술관이 있다. 무료입장이라길래 애들과 쪼르르 들어가서 기웃거려본다. 계획한 일정이 없으니 서두를 것 없이 오스투니를 슬렁슬렁 걸어다닐 수 있어 좋다. 이 동네는 유명한 건물이나 박물관, 명소가 있는게 아니다보니 반나절이면 충분히 구경할 수 있다. 그래도 그냥 떠나기 서운한 마음에 굳이 젤라떼리아에 가서 하나씩 젤라또를 입에 물고 한동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딱 봐도 몇 만명 살지 않을 것을 같은 이 마을을 보러 1년에 몇 십만명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이탈리아는 정말 북쪽끝에서 남쪽끝까지 국가 전체가 관광지구나 싶었다. 이탈리아가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여행지인것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