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시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허클베리의 맛
말썽꾸러기 ‘허클베리 핀’. 맨 처음 허클베리 열매를 입에 넣었을 때 떠오른 이름이다. 과즙이 많은 열매는 시고, 톡 쏘았으며 단맛은 끝물에 느껴질락 말락 했다.
나는 미국 시애틀 근처의 어느 숲이었다. 위오나 공원(Weowna Park). 흡사 이국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직역하면 ‘우리가 이 공원을 소유했다.’(We own a Park)라는 충격적일 정도로 단순하고도 미국적인 이름의 숲이었다. 그래도 다운타운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다리와 터널을 건넌 보람이 있었다. 숲은 초입부터 싱그러웠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벌써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오늘 함께 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나와 호스트를 포함 총 다섯 명이었다.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미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켄터키에서 온 니키와 에리카는 넉살 좋은 커플이었다. 니키는 변호사, 에리카는 IT 전문가라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곱슬머리가 매력적인 전직 신발 디자이너인 카밀은 캘리포니아 출신이었다. 역시. 숲에서 자생하는 식용 가능한 야생 열매의 종류를 파악하고, 그 맛과 효능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있고말고. 난 안심했다. 숲속 열매를 따 먹을 생각에 며칠 전부터 설렜던 내가 조금은 덜 괴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미 준비됐던 야생 열매 및 식용가능한 식물 리스트. 덕 중 최고의 덕은 양덕이라고 했다. 사진=박인정)
하늘 높이 쭉 뻗은 서양측백나무(Western red cedar)와 카펫처럼 두툼한 이끼와 켜켜이 쌓인 부드러운 솔잎들로 푹신한 숲길을 걷는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허클베리 나무였다. 무성한 잎사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조그마한 열매 몇 개를 노련한 숲 전문가 씬디아가 금세 찾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처음부터 허클베리를 만나다니. 어쩌면 난 이 열매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도 몰랐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국의 대표 작가 마크 트웨인이 지은 소설로 가장 미국적인 소설이라 평가받는 책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소년 허클베리 핀이 흑인 노예인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미국의 가장 큰 강인 미시시피강을 따라 내려가며 우여곡절을 겪는다는 내용인데, 하도 어릴 때 읽어 내용은 가물가물하고 열매 이름을 딴 특이한 주인공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허클베리(Huckle Berry)라……. 라즈베리나 블랙베리는 먹어봤어도, 목구멍을 울리고 혀를 차야 발음되는 이 열매는 언젠가 꼭 맛보고 싶은 과일이었다.
내 손에 들린 열매가 바로 그 허클베리였다. 작고 보잘것없다는 뜻을 가진, 몇 번이고 인공 재배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해 오직 야생에서 채취할 수 있다는. 허클베리는 개량되지 않은 자연의 맛 그대로였다. 달기보단 톡톡 튀고, 시고 씨가 많았다. 딱 ‘허클베리 핀’ 같달까. 흙 향이 나는 산미 때문인지 오래 여운이 남는 맛이었다. 점점 더 깊은 숲을 들어가며 나는 종종 찾아내는 허클베리나 살랄 베리(Salal berry)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살몬 베리(Salmon Berry), 띰블 베리(Thimble berry), 블랙베리 등등. 그렇게 나는 많은 베리를 땄다. 손에 붉은 물이 드는 것 따윈 개의치 않고 산새나 다람쥐들의 배를 곯게 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청바지를 물들이는 인디고 안료로 염색한 카밀의 손톱과 덜 익은 연둣빛 헤이즐넛. 사진=박인정)
이번엔 또 어떤 열매를 찾을 수 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숲속을 누비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것은 죽은 물고기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머리가 약간 틀어졌을 뿐 거의 온전한 상태였다. 토막 난 것도 아니고, 구워진 흔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 손을 탄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풀과 나무만 우거진 숲속 한가운데 생뚱맞게 물고기라니. 당황한 나는 앞서가는 일행을 불러세웠다. 가까이 다가온 씬시야는 우듬지로 빼곡한 숲속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마 근처 바다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은 수리가 숲 위를 날아가다 놓쳐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무슨 동화 같은 얘기였다.
놀랍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솔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털이 북슬북슬한 반려견 두 마리와 함께 숲을 찾은 등산객 중 하나가 자기 친구가 하늘에서 물고기가 떨어지는 광경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머리 위에 떨어질 뻔했다며. 숲을 산책하다가 머리에 물고기를 맞을 확률을 얼마나 될까. 아프기도 하겠지만 얼마나 황당할지 감이 안 왔다. 마저 갈 길을 내디디며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고기를 조심하자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산림욕을 마지막으로 세 시간여의 숲속 열매 투어는 끝이 났다. 갖가지 산 열매에 한창 입맛이 돋궈진 우리를 위해 씬시아는 쏘는 쐐기풀(stinging nettles)을 삶아 만든 페이스트와 허클베리 잼을 바른 비스킷과 자신의 앞마당에 따 온 블랙베리로 우리에게 단출한 티테이블을 차려주었다. 가지에 앉아 남몰래 낮잠을 자다 남다르게 시력이 좋은 변호사 니키와 눈이 마주친 올빼미는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새콤 시큼한 허클베리와 산중 죽은 물고기와 졸린 눈으로 윙크를 날리던 올빼미까지. 커다란 인형 집같이 생긴 유기농 가게를 들러 과일과 채소를 기념품으로 산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숲을 떠나는 씬시야, 니키, 에리카, 그리고 카밀. 사진=박인정)
어쩌다 이 숲에 모인 우리는 다 여성이었고, 인종이 다 달랐다. 난 유일한 외국인이었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고 별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생각보다 시고 톡 쏘는 야생 열매에 얼굴을 찌푸리고, 물고기에 맞을까 괜히 머리 위를 쳐다보고, 꾸벅꾸벅 조는 올빼미를 구경하며 홀짝홀짝 찻잔을 기울였을 뿐이다. 그게 어쩐지 위로처럼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를 묻지 않고, 인종이나 성별을 따지지 않고 단지 사람이고, 커플이고, 숲에 속한 존재로서 우린 그곳에 있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나도 숲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툭 하면 내 종아리를 스치던 황금비율로 똘똘 말려있던 어린 고사리손처럼, 숲의 여백을 촘촘히 채우는 푸른 이끼나 균류처럼 말이다.
다운타운으로 돌아가는 길, 현금 1달러가 모자라 우버를 잡아타려는 나에게 카밀은 선뜻 자기 지갑을 열어주었다. 덩달아 마음이 열린 나는 함께 탄 버스 안에서 카밀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려견을 돌봐주는 조건으로 여행경비도 아낄 겸 무료로 빈집에 머물고 있다는 그는 중고상품을 다루는 중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무턱대고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다.
적선 받은 1달러 때문도 있었으나 어쩐지 그러고 싶어졌다. 하도 먹어선지, 예술과 자연을 논하며 빛을 발하는 카밀의 눈은 마치 잘 익은 베리류 같았다. 인스타 주소를 공유하고 우린 각자의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허클베리. 힘차게 목구멍을 긁고 혀를 차 불러보는 그 이름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마침내 허클베리를 맛본 날이다. 그 맛이 결코 쓰고 시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영월매일에서 연재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