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없이 산 지난 6년.
나는 운전을 못 한다.
한국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미국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것도 텍사스라면 ‘그럼 마트는 어떻게 가나요?’ 나 ‘어디 갈 수도 없고 답답하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미국에 6년이나 있었다면서요. 운전도 안 하고 어떻게 버텼어요? 엄청 독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3개월째 거주 중인 칼리지 스테이션(College Station)은 마을 이름의 역(Station)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대중교통이 없다. 화물철도만 가끔 경적을 울리며 지나갈 뿐이다. 사람을 위한 전철이나 트램은 선로조차 존재한 적이 없고, 한국의 외진 농촌에도 하루에 두 대는 왕복하는 버스가 대학생들이 많이 거주하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셔틀버스라 대학 주변을 도는 것이 고작이고 학생들이 줄어드는 방학 때면 가뭄에 콩 나듯이 뜸해진다.
올여름 이 동네는 유난히 더웠다. 갓 이사를 와 짐을 풀고 가구를 조립하는데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오래 지속된 가뭄에 탈수증 걸린 개미 떼가 집의 틈새마다 기어 나왔다. 습도계의 눈금이 10퍼센트를 찍곤 하던 건조한 애리조나에서 살다 너무 오랜만에 겪는 습한 여름이라 그런지 나도 자꾸 몸이 축났다. 입맛도 없고 절로 살이 빠졌다. 그나마 시원하고 달달한 게 당겼는데, 편의점 슬러시 하나라도 사 올라 치면 자동차 핸들을 잡아야 했다. 나는 슬그머니 남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그게 미안하기도, 서럽기도 했다.
(북미 대륙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유니언 퍼시픽(Union Pacific) 대륙횡단철도. 길이만 해도 51,518km이다. 화물만 싣지 말고 사람도 좀 실어다 주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박인정)
운전면허를 딴 건 21살 겨울방학 때다. 아침이면 운전면허 학원에서 운영하는 노란색 봉고차를 타고 서울 외곽으로 가 조수석에 기다란 막대가 딸린 도로연수용 차를 몰았다.
학원 이틀 차,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제 배운 걸 복습하겠다며 호기롭게 발재간을 부린 게 잘못이었다. 결국 전조등 수리비로 10만 원을 물어줘야 했다. 허락도 없이 내 멋대로 핸들을 잡은 게 첫 번째 실수고, 브레이크가 아닌 액셀을 밟은 게 가장 큰 실수였다. 세게도 아니고, 발끝의 각도만 살짝 낮춘 것뿐인데 쿵 하고 벽을 들이받은 그때의 충격과 놀라움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에 따 버린 면허는 그대로 장롱 속에 처박혔다. 일단 나는 차가 없었고 내가 사는 서울은 직접 운전하지 않아도 어딜 가는 방법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하철로 통학하던 내가 가장 애용하던 스팟은 7호선 장암행이나 도봉산행 열차 1량, 긴급 소화기가 내장된 운전석 출입문 옆이었다. 좌석은 없고 매끈한 하얀색 벽만 있는 그곳은 사람이 많든 적든 등만 갖다 대면 수능 영어단어와 숙어가 절로 외워지는 곳이었다.
버스는 안 가는 데가 없었다. 은근슬쩍 쌓아놓은 자재들로 ‘주차구역’이라는 글씨의 ‘ㅈ’정도만 빼꼼 보이는 청량리 약령시장의 비좁은 골목 사이나 어귀에도 버스 정류장은 존재했다. 각종 꽃무늬 패턴으로 화려한 할머니들의 바지와 한자가 섞인 중후한 간판들과 마녀의 비밀 레시피 재료도 팔 것만 같은 약재상들을 구경하러 나는 엄마를 따라 버스에 오르곤 했다. 강남에서 친구나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면 파란색 146번 버스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영동대교 아래 출렁이는 도시의 빛을 바라보며 줄 달린 이어폰을 꺼냈다. 명절에 시골에 내려갈 때만 아빠 차를 탔다. 다섯 식구라서 그런지 7인승 테라칸도 버스나 지하철보다 좁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게 내 어린 시절이었다.
(비가 갠 후 텍사스의 고속도로. 구름도 텍사스답다. 사진= 박인정)
자동차는 내 몸 하나 배달하는 수단쯤으로 생각했는데 미국에 오니 완전히 달라졌다. 이곳에서 자동차는 마치 신발 같다. 없으면 갈 수 있는 데가 없다.
아무리 후진 신발이라도 맨발보다는 나은 법이다. 불투명하든 투명하든 내가 6년을 살았던 애리조나 투손에서는 사람들은 덕 테이프를 애용했다. 덕 테이프로 사이드미러를 고정하는 건 애교였다. 어떤 사람은 반쯤 떨어져 바닥에 모서리가 질질 끌리는 뒤 범퍼에다가 붙이고, 어떤 사람은 깨져서 홀랑 없어진 조수석 창이나 뒷유리 창틀에다가 칭칭 감고선 장을 보러 다녔다. 경찰에게 걸리지 않는 한 갖은 수를 써서 어떻게든 차가 굴러가게 만드는 그들의 창의력과 뻔뻔함은 문콕 하나에도 목청을 드높이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불볕더위가 아닌 선선한 가을에도 도보를 걷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인적이 끊긴 인도엔 선인장 가시만이 무성했고, 커다란 콘크리트판으로 만든 포석은 그 아래 깔린 흙바닥에서 밀고 올라오는 힘센 뿌리 때문에 중간중간이 피라미드처럼 불쑥 솟아있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오직 덕 테이프만 가진 사람들, 그러니까 덕 테이프로 고칠 차마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큰 도시에서는 약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뉴욕 맨해튼이나 시카고, 최근에 다녀온 시애틀 다운타운 같은 관광 지역에서는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맨해튼이야 굳이 언급할 필요 없이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곳이고, 시카고와 시애틀의 유명한 관광지 인근에도 인도나 건널목이 잘 조성되어 있다.
그렇게 걷기 좋은 곳들에 또 하나 추가되는 항목이 있다. 바로 냄새다.
영월매일에서 동시연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