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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Oct 20. 2022

역이 없는 역에 삽니다 (2)

제발 볼일은 화장실에서 봐주세요.

나의 첫 미국 여행지는 LA의 할리우드였다. 그 유명한 할리우드 거리에서 지하철역을 발견한 나는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미국 영화산업과 문화 아이콘의 중심지에 떡하니 그 이름을 붙인 역에 들어가 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가는 내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은 냄새였다. 오래 묵힌 암모니아의 냄새, 다르게 말해 오줌의 지린내. 난 내 후각을 의심했다. 여기는 서울역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스파이더맨과 미키 마우스에게 손 인사를 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내가 아는 유명인의 이름이 박힌 별이 몇 개인지 세어보고 오는 길이었다. 


지린내에 딸려오는 또 다른 냄새는 내가 밟고 있는 이 에스컬레이터를 멈추게 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내게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지하로 뻗은 에스컬레이터 끝에 어슬렁거리는 반쯤 동공이 풀린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하마터면 다시 올라갈 뻔했다. 


어찌어찌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론 남편의 손을 잡고 역사 안으로 들어가기는 했다. 그러나 못 맡을 것을 맡고 못 볼 것을 본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옛날 필름 림으로 장식된 천장이나 야자수 모양으로 고풍스럽게 꾸며진 역사 내 기둥들을 감상하면서도 코를 찌르던 악취와 반쯤 풀린 눈과 또다시 마주치는 것은 아닐까 봐 코를 큼큼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할리우드/바인 역(Hollywood/Vine Station)의 오래된 필름 림으로 채워진 천장과 옛날 영사기와 야자수 모양의 기둥들. (사진= DTLA BOOK 2017)



맨해튼 지하철의 벤치에서, 시카고의 어느 현금 인출기 앞에서, 시애틀 다운타운에 위치한 3번 가의 문이 닫힌 어느 유기농 비누 상점 앞에서 난 그 냄새와 눈빛들을 다시 맞닥트렸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걷기 좋은 골목마다 그들은 어김없이 존재했다. 지인이 한국에서 입양해 온 강아지 메리는 그런 냄새와 눈빛들을 맞닥트릴 때마다 맹렬히 짖어댔기에 우리는 쏘리를 연발하며 메리의 하네스를 끌어당겨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우연히 방문한 시애틀의 아마존 본사는 마치 오아시스 같았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 기업답게 모든 게 청결하고 깨끗했다. 청량한 유리알처럼 만들어진 건물에다 조화로 의심될 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조경 식물들로 무척 잘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건널목 하나만 지나면 나오는 기념비 공원에는 팬티가 다 보일 정도로 헐렁한 바지를 입은 채 약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렸다. 나는 그와 어깨를 부딪치지 않도록 빙 돌아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노숙자 때문에 상권이 망한 건지, 상권이 망해서 노숙자들이 몰려든 건지 아마존 본사에서 걸어서 5분이 걸리는 3번 가의 상점들은 거의 폐점한 상태였다. 한때는 백화점도 있고 화장품 가게도 있었다는 그곳은 이제는 노숙자들의 소굴과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은 등을 내보인 채로 바닥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빈 맥도날드 컵을 들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하릴없이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일회용 비닐로 겹겹이 싼 뭉치들을 실은 커다란 쇼핑 카트가 짐짝처럼 놓여있었다.


차를 모는 사람은 그냥 지나쳤을 풍경이다. 어쩌면 밖이 훤히 비치는 유리창 안에서 실내 암벽등반을 즐기던 아마존 본사 직원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풍경이다. 허클베리를 따러 갔던 위오나 숲에서 만난 켄터키 출신 어느 IT 전문가는 아마존 본사가 시애틀에 생기면서 집값이 껑충 오르는 바람에 월세를 제때 못 내고 쫓겨난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는 울창한 수풀에 가려진 커다란 집 하나를 가리키며 아마존 고위급 간부가 최근 매매한 집이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그 CEO에게 과연 저 집은 몇 번째 집일까. 그들은 과연 버스를 타고 돌아갈 집은 있는 걸까. 3번 가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던 노숙자들을 떠올리며 난 그 대궐 같은 집을 바라보았다. 허클베리의 시고 쓴 맛은 여전했다. 그게 오래 갔다.


이른 아침 3번 가. 폐업한 가게들을 검은 판자들로 막아놨다. 당장은 깨끗한 이곳은 금세 노숙자와 쓰레기로 넘쳐난다. (사진=박인정)



어느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천 명당 868명이 차를 가지고 있고, 그 누적 수는 거의 3억 대에 달한다. 퇴근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조수석이나 뒷자리는 대부분 텅 비어있다. 한 사람을 위한 거대한 쇳덩이들로 4차선 도로는 아침과 저녁마다 막히곤 한다. 그게 무한 반복된다. 딱 필요한 만큼만 떼어 몰고 다닌다면 얼마나 많은 자원이 절약될까. 현실 불가능한 상상을 하면서 나는 혼자 5인승 2019년형 토요타 코롤라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반갑게 맞이한다. 그게 반복된다. 


좋든 싫든 미국에서 운전은 필수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뉴욕 맨해튼이나 보스턴 같은 동네로 이사 가지 않는 한 나도 언젠가 차를 몰게 될 것이다. 이틀 만에 전조등을 박살 낸 한국에서의 기억과 미국에 오자마자 멀쩡히 주차된 픽업트럭의 꽁무니를 받아버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서 말이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거나 무릎의 연골이 닳을 때가 되면 아마 자진해서 차를 몰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나에게 운전은 두렵고 비싸다. 미국에서 차가 아무리 신발이고 필수라고는 해도 내 몸뚱이 하나 편해지고자 한 대를 더 사는 건 오염이자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버나 리프트를 탈 생각이다. 날이 선선해지면 스타벅스나 햄버거 가게 정도는 걸어서 가보고자 한다. 다행히 우리 동네는 메리가 왈왈 짖을 만큼 지린내 나는 사람이 없고 도보도 잘 조성되어 있다. 풀이 많고 깨끗하다. 


나는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큼직한 가방을 멘다. 꼭 필요한 것만 사서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사는 아파트엔 도로와 연결되는 작은 다리가 있다. 날 좋고 볕 좋은 날 그 다리를 건너보고 싶다. 베란다에 나가면 보이는 기다란 숲과 연결된 다리인데 무성한 우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아래로 물이 흐른다. 아마 개구리도 있을 것이다.


노을 지는 다리의 모습.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 이것이 다리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사진=박인정)



내가 멜 수 있는 가방의 무게만큼 감당한 채로 오늘도 나는 뚜벅이.


내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보겠다. 6년이나 미국에 살았는데 아직도 핸들을 못 잡는다는 사실이 조금은 쪽팔리고 나조차 황당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돈을 아끼고 지구에게 덜 미안하니 그걸로 됐다. 당장은 나도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기 싫다. 나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만큼 운전실력을 쌓은 다음에 핸들을 잡으려 한다. 드라이브하며 감상하는 내 플레이리스트도 또 다른 운치일 테니까.


영월매일에서 동시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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