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지나가서 아름답다. 간혹 불시에 찾아온 추억으로 현실이 더럭 멈추어 설 때가 있다. 당신도 그러리라 믿는다. 잊고 지냈던 기억을 곱씹느라고 그 밤의 잠을 뒤척일 때가 있다고.
어떤 날은 꿈이 하루보다 길고, 가끔은 하루가 꿈만 같다. 하지 못한 말들과 해야 했던 말들이 날개를 달고 지금의 나를 과거로 데리고 간다. 내 손 안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가 들려있다. 급식을 먹고도 여전히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달려간 매점에서 난 슈가 파우더가 군데군데 묻은 꽈배기 빵을 고른다. 흰 사각 우유도 함께다. 빵은 달고 우유는 차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산을 마주한 채로 쉬는 시간이 끝날세라 서둘러 빵을 입에 욱여넣는 나는 성급하고 어리다. 우유는 너무 차가워 마치 겨울을 삼키는 것만 같다.
교복을 입던 시절 나는 니콘 디지털카메라에 일상을 담곤 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교실을 배경 삼아 친구들에게 렌즈를 들이밀었다.
어떤 것은 살아남았고, 대부분 영영 묻혔다. 찍을 줄만 알지 바르게 저장할 법을 몰랐던 나는 촬영한 사진들을 빈 CD에 저장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동그란 표면에 음각된 예민한 날줄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뎌져 갔다. 어느 날 열어 본 CD 속 사진들은 거의 손상되어 열리지 않았다. 발굴되지 못한 채 영영 닫힌 사진들은 그렇게 버려졌다. 친구들은 두고두고 서운해했다.
그래도 나는 기억한다. 내가 렌즈를 들이대면 슬쩍 자세를 고쳐 앉던 친구들과 그 앳되고 맑은 표정들을. 동그란 렌즈에 꽉 차오르던 네모난 교실의 이모저모를. 거기엔 한쪽 눈을 감고 미리 보기 창에 눈동자를 들이밀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그러니까 친구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수업을 들으며 같은 선생님 뒷담화를 까며 점점 닳아가는 4B연필로 무수한 선과 면으로 흰 도화지를 빼곡히 채워 나가던. 같은 게 너무 많아서 어떻게든 달라지려 고군분투하던. 세월이 흐르며 이제는 너무 달라져 버린 친구들과 인생의 겉면을 카톡 창 몇 개에 쪼개 나누며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려는 지금의 우리는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비가 와서일까. 오늘따라 묻히고 잊힌 것들이 자꾸 생각난다. 살면서 얻은 것들 위로 예전의 내 모습과 옛 교실의 전경이 자꾸만 겹쳐진다. 생각해 보니 그땐 우리 모두 안경을 썼었다. 다 같이 동그랗고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