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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Dec 24. 2022

집이 없거나 서류가 없거나, 우리는 떠도는 중입니다 2

남의 지붕을 고치고자 제 지붕을 떠나온 사람들


미국은 넓은 땅덩어리만큼 자연재해가 빈번한 곳이다. 내가 애리조나 투손에 살았을 때 만해도 산등성이를 넘나드는 산불을 꼬박 한 달이 넘게 매일 아침 침실 창문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 캘리포니아에서는 기록적인 대형산불이 일어나 1,000킬로미터나 떨어진 투손의 하늘까지 뿌옇게 흐렸다. 2달 전, 남편이 면접을 보러 플로리다를 갔을 때는 87년 만에 최악의 인명피해를 기록한 허리케인 ‘이언’의 여파로 해안가 도시들은 여전히 쑥대밭 상태였다.


9·11테러 이후 가장 끔찍한 사고로는 2005년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카트리나를 꼽을 수 있다. 유례없이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바닷물을 막아놓았던 제방까지 무너지며 해수면보다 낮은 지대가 전부 물에 잠겨 2,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종하고 사망했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어버린 이재민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부시 정권은 서둘러 도시 재건에 돌입했고, 그래서 고용된 사람 중 4분의 1이 불법체류자들이었다. 


9·11 테러의 여파로 밀입국자와 불법 체류자를 더욱 엄중하게 처벌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미국인들은 허리케인으로 황폐해진 그들의 땅을 밀입국자와 불법 체류자의 손에 맡겼다. 각종 쓰레기가 섞인 진흙을 긁어내고, 물에 떠내려온 돼지 사체를 거두려는 미국인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은 힘들고 고된 일을 꺼렸던 백인 노동자 대신 대륙 횡단 열차를 짓기 위해 중국인 2만 명이 혹한과 폭염에도 불구하고 망치와 못을 들었던 1848년 골드 러쉬 때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언젠가 애리조나의 노갈레스(Nogales)라는 곳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이름의 멕시코 마을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맞붙어 있었다. 알고 보니 원래는 하나의 도시였으나 장벽이 세워지며 갈라진 도시가 되어버렸단다. 한때는 미국과 멕시코를 자유롭게 왕래하던 열차 노선 위엔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분위기는 어쩐지 한적한 동대문 시장이었다. 물가도 저렴해 달러 몇 장을 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데 길 건너편에서 경찰 한 무리가 어떤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히스패닉계의 비쩍 마른 남자는 무장한 경찰을 보고 체념한 듯 군말 없이 수갑을 찬 채로 연행되었다. 대낮에다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국경도시에서는 자주 접하는 풍경인지 노갈레스 주민들은 별 동요치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놀란 건 한 보따리 사서 상점에서 나오던 나와 벤치에 앉아있던 남편뿐이었다. 


(미국 측에서 바라본 노갈레스 장벽. 2019년 2월, 미 육군은 노갈레스를 가르는 철책에 더 많은 철조망을 추가했다. 사진= AZcentral)


예전엔 시청과 소방서 건물로 사용되었다던 노갈레스 역사박물관엔 오래된 유치장이 보존되어 있었다. 라이터 불로 천장을 지져 새긴 영어와 스페인어로 된 욕설과 낙서들 사이엔 심지어 한글도 적혀있었다. 수십 년 전 이 낙서를 남긴 한국인도 남몰래 미국에 체류하다 적발되어 이 좁다란 감옥에 갇혔던 건 아닐까. 경찰에게 끌려가던 남자와 이미지가 겹치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배를 타고 넘어온 유럽 이민자들이 무단으로 개척한 나라다. 이 땅에 가장 마지막으로 깃발을 꽂은 자들이 만든 법의 굴레에서 누구는 불법 체류자가 되고, 누구는 합법체류자가 된다. 멀쩡한 마을이 6미터짜리 철책 장벽에 나뉘어 더는 열차마저 다니지 못하는 이산 동네가 되고 만다. 


무단으로 이 땅에 살고 있다며 비난하며 내쫓을 궁리를 하면서도 미국은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알음알음 착취한다. 멕시코나 파라과이 등지에서 남몰래 넘어온 사람들은 최저시급에 한참 미치지 않는 수당을 받으면서도 석면 가루와 곰팡이를 들이마시며 토네이도에 날아간 미국인들의 지붕과 기둥을 대신 세운다. 형편없는 임금은 그마저도 부당하게 떼어먹힐 때가 빈번하지만, 그들은 토네이도로 엉망이 된 걸프만의 해변 도시를 따라 온갖 궂은일을 도맡는다.


아마존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나이 지긋한 노마드 노동자들과 자연재해로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는데 손을 보태는 남미의 불법 체류자들은 아주 다르기도, 아주 닮기도 했다. 


그들은 누구도 선뜻 내켜 하지 않는 일을 자진한다. 집이 없는 유목민은 브라질의 아마존만큼이나 거대한 창고에서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씩 걸어 다니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분류하고, 서류가 없는 유목민은 허리케인 ‘이안’의 영향으로 여전히 복구에 한창 중인 플로리다 포트마이어스 비치에서 종일 두껍고 무거운 방수포 지붕을 걷는다. 그 일들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또 다른 쓰임이 되고자 미국 전역으로 흩어질 것이다. 혈관처럼 촘촘히 뻗은 미국의 도로를 타고 어디든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말이다.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동네는 마치 미국의 모델하우스 같다. 모든 주택이 깔끔하고 도로와 인도도 잘 정비되어 있다. 마을 구성원 상당수가 백인이고, 다들 점잖고 친절하다. 


(온갖 조명과 설치작품으로 오색찬란한 산타 마을의 풍경. 훌쩍 다가온 크리스마스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사진= Santa‘s Wonderland 공식 홈페이지)


며칠 전 놀러 갔던 산타 마을에서 바비큐를 굽고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 대다수는 유색인종이었다. 몸집이 다부진 어떤 히스패닉 남자 직원은 분명 힘에 부칠 법도 한데 슬로프 위에서 무척 열심히 눈썰매를 밀어주어 아이들의 입에서 함성이 끊이지 않게 만들었다. 


이토록 휘황하고 화려한 산타 마을은 처음이라 신이 난 아시안 부부를 위해 그들은 그들의 주말과 크리스마스를 반납하고 산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사실은 우리가 입장료를 얼마를 내든, 그들이 시급으로 얼마를 받든 고마운 일이다. 미술관으로 데이트하러 오는 커플에게 로맨틱하고 우아한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20대의 크리스마스를 4번 반납한 경험이 있는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물이, 휴가로 놀러 간 운치 있는 해변이 유목민의 손을 거친다. 계절과 재해를 따라 미국을 유랑하는 노동자들의 손에서 그 가치를 발하고 회복된다. 만약 그들이 없다면 크리스마스는 악몽이 될 것이고, 태풍으로 부서진 집을 고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 이재민과 실향민이 대폭 늘어날 것이다. 그럼 아마존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지 모르겠고, 어쩌면 내 협탁은 이미 배송되고 조립되어 내 침대 곁에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 늦게 배송받는 게 낫다. 한 사람이라도 바퀴 대신 지붕 있는 집에 사는 게 낫고, 한 사람이라도 고쳐진 지붕 아래로 서둘러 돌아가는 것이 낫다. 언젠가 도착할 내 협탁을 기다리며 나는 광활한 아마존에서 산타의 요정 대신 열심히 크리스마스 선물을 분류하고 있을 유목민을 떠올려 본다. 이 순간에도 해변으로 떠밀려온 쓰레기를 줍기 위해 쉴 새 없이 허리를 굽혔다 펴는 유목민들을 말이다. 그들의 유랑이 있기에 나의 유랑이 없다. 나의 크리스마스가 즐겁다. 



영월매일에서 동시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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